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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재나 Nov 15. 2024

오늘은 뭘 먹을까, 내일은 어떻게 살까

마지막화

정신과약을 꾸준히 먹은지 1년이 지났다. 

울며불며, 왜 사는지 모르겠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던 나는 어느덧 그 자리에서 담담히 나의 우울과 불안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나의 안정제는 나의 안정시키는 것 이상으로 졸리게 만들었다. 선생님인 그것은 이제 내가 많이 안정되었다는 의미이고 약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설명해줬다.


강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강해졌고, 유연해졌다.

나에게 2024년은 막을 수 없는 폭풍이었고 잔잔한 숲속의 호수였다. 


병원에 다녀온 날, 마트에서 대패삼겹살 2kg를 샀다. 집에 가져와서 4번씩 나누어서 소분해서 냉동실에 보관했다. 우선 강황가루를 넣어서 솥밥을 했다. 

처음 솥밥을 할 땐 밥을 얼마나 태워먹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뜸을 들이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을 끄고, 남은 열기로 쌀을 구수한 밥이 되길 기다린다. 인터넷에 나온 10분, 20분 보다는 중간 중간 뚜껑을 열어보고 수저로 저어보고, 직접 먹어보는 게 더 정확하다. 우리집 인덕션의 불이 다른 집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간장과 굴소스를 넣고 대패삼겹살을 볶았다. 참고로 유기농 마트에서 산 간장은 이상하게, 지금까지 썼던 대기업보다 더 짜다. 그래서 실제 정량보다 조금 덜 넣어야한다. 그래서 최근 몇 주간 간장 넣은 음식은 다 망했었다.


볶은 대패삼겹살을 솥밥 위에 올리면 완성이다. 어딘가에서 찾아보지 않고, 이렇게 만들면 맛있겠다 싶어서 만든 음식이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유투브를 틀었다. 우리 부부는 만약에 놀이를 좋아한다 (사실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한다) 밥을 먹으면서 50% 확률로 10억받기, 100%확률로 1억 받기 토론을 열심히 했다.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는 남편 몫이다. 나는 남편이 조금이라도 덜 설거지 했으면 해서 요리를 하면서 중간 중간 설거지를 하곤 한다. 정신이 없는 요리를 하면 쉽지는 않다.


적당히 소화가 되었으면, 집 앞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 깔짝 대는 수준의 운동이지만 들 수 있는 무게는 조금씩 늘어간다. 운동이 끝날 때 쯤 맞춰서 남편이 우리집 귀염둥이, 리사를 데리고 나온다. 동네 개천을 한바퀴 돌면서 회사 이야기, 일상 이야기를 나눈다. 아직도 궁금한 게 많은 리사는 여전히 산책로를 빠르게 누빈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사랑한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오면, 보리차를 끓인다.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보리차가 끓는 동안 뜨개질을 한다. 요즘은 남편이 입을 가디건을 뜬다. 올 해 안에 뜰 수 있을까. 중얼대면 남편이 내년에 입으면 되지 괜찮아. 라고 다정하게 말해준다.


늦은 밤에 되면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간략히 메모수준으로 일기를 쓰고 눕는다. 자기전에 리사에게 뽀뽀하고, 배를 만지작 만지작 해주는 건 필수 코스다. 


집 안이 고요해진다. 

오늘 하루도 정말 수고했다. 예전의 나는 정말 내가 수고 해야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치는 높았고 그 기대치가 높은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잘해야만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금방 지쳤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하지 못할까봐 불안했고, 그러다 실수라도 한 번 하면 완전히 멘탈이 나갔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할 수 없지만 줄어든 약의 개수만큼은 좋아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한테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매일 저녁을 직접 준비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내가,

자랑스럽다.


잠이 솔솔 쏟아진다. 그러다 눈이 번쩍 뜨인다

아 맞다, 내일은 뭐해먹지? 


머릿속에 냉장고안의 식료품들이 떠오른다. 양파가 없는 거 같다, 마늘은? 다 썩어가는 무화과는 어떻게 해먹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음식들은 메인 재료가 정해지니까 생각을 멈출 수 있게 된다. 아직 대패삼겹살이 많으니까 내일은 대패삼겹살로 쪽파를 썰어넣은 파스타를 해야겠다! 저녁은 정하고 다니 다시 노곤노곤 잠이 온다. 


그래, 앞으로 이렇게 하루 하루 저녁을 해먹으면서 살아야지.

제철음식, 너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상을 채우고 하루를 고생한 우리를 치하하면서 그렇게 살면 나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자. 


- 내일의 요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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