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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재나 Nov 07.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다 밀키트 11

회사에서 받은 업무 피드백은 나에게 크게 영향을 줬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억울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시체처럼 가만히만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퇴사도 생각해보고, 휴직도 생각해봤다. 어딜 가든 다 똑같아, 맞긴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지 않은가.  


생일을 맞이하여 바다를 보러 갔다. 한 달 전에 미리 예약해두었고, 힘든 일 때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현실로부터 도망친 상황이 되었다. 

애견동반 여행이 되어서 외식이 힘들 거 같았다. 원래라면 가서 먹을 요리 재료들을 잔뜩 챙겼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서 어쩌다보니 밀키트만 몇 개 사갔다. 나의 짧은 요리 인생에서 용납하기 힘든 것들 중 하나가 밀키트 였다 맛이 없을 것이고, 또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뭔가의 결과를 얻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밀키트라, 간편할 것이기 때문에 이번엔 남편이 요리를 도전했다. 

걱정되어서 부엌을 기웃거리니, 설명서가 친절해서 괜찮다고 손사레를 쳤다.  

중국식 면요리 뱡뱡면이었다.  해동 된 면은 5분 정도 삶고, 그릇에 담고 향미유라는 것을 면을 감싸주고, 소스를 넣고 섞는다. 오이나 고수를 넣어도 맛있다고 적혀있다.  


딱 두 줄이면 충분한 레시피였다. 어차피 밀키트인 거 집에서 만들어먹기 힘든 걸 사보자, 해서 사본 것이다. 라면보다 쉬웠다는 남편의 평과 함께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왔다. 

넓은 도삭면에 빨간 소스가 비빔면처럼 올라가 있었다. 한 입 베어물자, 약간의 마라향과 면의 쫄깃함이 입안에 밀려들어왔고, 우리 둘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해치웠다.  


신으로 내려서 먹는 커피만이 커피다, 라고 생각했건만 어떤 유명한 병커피가 맛있대서 사왔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병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먹었다. 인스턴트 커피 특유의 향은 어쩔 수 없었지만 뱡뱡면의 알싸한 매운 맛을 잠재우기엔 충분했다. 하. 살것같다. 우리는 소파에 늘어져라 탄수화물 먹은 이후의 나른함을 즐겼다.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다의 썰물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2박 3일 여행 중에는 애견동반이 가능했던 식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밀키트로 식사를 했다. 요리가 쉬운 건 맞지만 그렇다고 맛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집이라면 먹지 않았을 밀키트를 먹으며 여행을 즐기고 나니 기분이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 바다를 보고, 걷고 지역 축제도 구경했다. 어이없는 일이 있어서 소리 내서 깔깔 웃기도 하고 강아지 때문에 모르는 사람과 스몰토크도 했다. 

그 바다 여행은 신기하게도 나의 괴로운 감정을 썰물처럼 밀어내는 것 같았다. 


감정을 다 내보내고 나니 남은 것은 폐허인 나의 집이었다. 허리케인은 나를 마냥 부수기만 하지는 않는다.

 잘 찾아보면 아직도 쓸 수 있는 자재들도 많이 남았다. 30년 넘게 살면서 만난 나의 자연재해들은 나를 마냥 힘들게만 만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출근을 해서 나의 문제를 점검해보고 객관적으로 바라봐줄 사람과 충분히 더 이야기를 해봤다.  

너무 힘들지 않도록 마냥 내 편이 되어줄 사람과도 중간 중간 이야기를 해서 에너지도 얻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할 일이 명확히 보였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내 식으로 전부 고쳐갔다. 그렇게 다시 업무를 진행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니 오히려 무너지기 전 보다 더 업무 처리가 더 수월해졌다고 느껴졌다. 


나를 당연히 모두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또는 싫어하지 않았다.  

개선점을 찾아서 고민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다보니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저녘 회사 동료로부터 DM을 받았다. 거기 팀은 사람 참 잘 뽑은거 같아요, 일을 정말 잘하시네요. 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얼마 전 실패했던 파전을 다시 했다. 부침가루도 충분히 넣고 열심히 저었다. 

오랜만에 일하면서 칭찬을 받았지만 마냥 기분 좋아서 동동 거리지 않는다. 침착하게 파전을 부쳤다. 살다보면, 비난 받을 때도 칭찬 받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게 나라는 사람을 좌지우지 해서는 안된다. 

비난받은 나도 칭찬 받은 나도 여전히 나로 여전히 있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밀키트였던 오뎅탕을 집어 들었다. 

그저 다 한번에 냄비에 때려놓고 끓이기만 해면 되는 쉬운 수준이건만, 설명서는 다정했다. 

물 850ml, 물이 끓고 어묵과 재료를 넣고, 어묵을 다 먹고 우동사리를 넣어주세요. 곤약묵이 있다면 곤약묵을 곁들이면 더 맛있답니다. 

진심으로 먹는 이가 맛있었으면 하는 그 밀키트의 다정함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되는 순간이 있어도 되는 것 같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완벽한 파전을 만들었다. 바삭했고, 감칠맛도 좋았다. 남편도 극찬했다.  

오뎅탕 밀키트는 분하게도, 내가 만든 것보다 감칠맛이 훨씬 좋았다. 

우동사리 면은 왜 이렇게 쫄깃하고 맛있던지. 진정으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도망친 곳에서 나는 날 잘 보살폈고, 여기 잘 존재하고 있다. 잘했다. 정말 크게 칭찬해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 자신에게 이런 작은 다정함을 허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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