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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재나 Oct 21. 2024

길 잃은 팟타이 08


스물 네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을 때 낯선 냄새, 사람, 풍경보다 어려운 건 구글 맵이라는 어플이었다

네이버나 다음 지도에 익숙해져있다가, 구글 맵으로 길을 찾아다니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쓰는 지도 어플은 길이 헷갈리면 가게에 전화해서 길을 묻거나, 영업 여부를 거침없이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것도 할 수 없으니 난감했다.


방콕의 습한 골목 사이 사이로 유명한 팟타이 맛집을 겨우 찾아냈지만 닫혀있었다. 돈이 없던 우리는 가장 비행기표가 쌌던 우기인 비수기에 여행을 갔고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폭우가 내렸다. 동남아의 우기는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덥고 덥고 더웠다. 없던 짜증도 몰려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린 한국에서 찾아놨던 새로운 팟타이 맛집을 가는 것보다 옆 집에 현지인들이 앉아있는 노상 가게에서 팟타이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이 뽑은 최고의 팟타이집이랬는데, 거길 못가다니. 나는 풀죽은 상태로 그 가게의 꼬불꼬불한 태국어 메뉴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알고있는 한 단어 팟타이! 하고 손가락을 두 개 펴서 두 개를 주문했다.

노상 구석에서 사장님은 새우인지, 닭인지, 비건인지 물었고 그 과정에서 온갖 손짓과 발짓을 통해 새우와 닭을 주문했다.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팟타이를 볶았다. 우리는 이게 여행이지만 저들은 저게 일상이라는 것이 재밌게 느껴졌다.


주문한 음식은 5분만에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팟타이는 진한 액젓 냄새 같은 게 났다.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도 팟타이를 흔하게 파는 음식이 아니어서 어떤 맛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잔뜩 허기져서 인지, 숨은 맛집이었던 건지 우리는 인생 첫 팟타이를 맛있게 먹었다. 계란의 맛과 쫄깃한 쌀국수 면, 알 수 없는 단맛과 새콤함이 어우러지는 소스가 자극적이고 맛있었다.

여유가 생겨서 주변을 둘려보니 모든 현지인들이 우리처럼 팟타이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로 치면 기사식당에서 외국인이 불고기 백반을 먹는 것과 자찬가지인 상황인걸까?  

분명 원하던 맛집을 간 건 아니었지만, 팟타이는 가격도 쌌고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 먹기 무섭게 바로 구글맵을 켰다. 다음 장소의 길을 알아내야 했다. 우리에게는 태국이라는 곳을 즐길 시간이 4박 5일 밖에 없었다. 해서 여기서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야했다.

다음 장소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다는 망고 파는 트럭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구글 맵으로 찾지. 고민하고 있자 팟타이 가게 사장님이 망고 트럭 사진을 보고 저쪽 골목이라고 손짓으로 알려주셨다. 태국 사람들 그렇게 친절하다더니, 우리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컵쿤카, 컵쿤카를 외쳤었다.

결국 찾아간 그곳에는 망고 트럭 없었고, 그 대신 수박 주스를 파는 트럭이 있어서 우리는 수박주스를 마셨다. 한국과 분명 비슷한 수박일 텐데 더 맛있게 느껴졌던 달콤한 수박주스를 잊을수가 없다.


4박 5일 간의 여행은 맛집 찾기 실패, 습하고 더움, 배탈, 날아다니는 바퀴벌레에 경악, 호텔 수영장에서 생각보다 깊어서 빠져버려서 호텔 직원이 구해준 창피했던 것들의 모음집이었지만 행복하게 웃으며 말린 망고와 까맣게 탄 얼굴과 함께 한국에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몇 번의 해외여행을 반복하고 길 찾기가 극한으로 어려웠던 유럽 여행까지 다녀오자 나는 구글맵 마스터가 되었다. 나중에는 구글맵에 인종차별 심한 파스타가게에 악평을 남기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이십 대 내내는 계절만 바뀌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싶었건만 어느 순간 부터인가 여행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사실 그건 여행 뿐이 아니었다. 삶의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크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과 화려한 문화유적지, 한국에서는 먹기 힘든 맛집들도 이제는 크게 기대되지 않았다.



집 회사 헬스장을 반복하던 일상에서 오랜만에 사는 지역에서 두시간을 벗어나야하는 곳을 가야했다.

동생이 힘들게 예약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버스만 두 번 지하철만 한 번을 갈아타야하는 고난이도 장소였다.

여섯시까지 가야해서, 두시간 전에 나왔건만 경기도 버스는 자리가 없어서 두 번 보내야했고, 지하철은 생각보다 늦게 와서 예상 도착 시간이 30분이 밀려버렸다. 동생의 잔소리가 아찔했다.

지도 앱을 열심히 새로고침해서 중간에 갈아타는 게 아니라 도보 9분을 사용하면 더 빠르게 도착할 것이 확인되었다.

지도 앱의 도보란 10세 이하의 어린이 기준이라는 카더라가 생각났다. 성인 여성은 9분이 아니라 5분 컷일 것이라고 확신해서 버스에서 내려 빠르게 지하철로 뛰어갔다. 고불 고불한 골목을 지나서, CU에서 좌회전 멀리서 지하철이 보였다. 지하철은 2분 뒤에 온다. 이를 악물고 뛰어갔고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지하철 내에서 헥헥 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6시였고 동생에게 '언니 죽는다?'라고 카톡이 떴다. 모르쇠 하고 다음 역에서 나는 내렸고 12번 출구를 열심히 찾아서 갔다. 하필 또 에스컬레이터가 없어서 열심히 계단을 두개씩 뛰어 올라갔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딱 15분을 늦었다. 동생은 툴툴 대며 나를 구박했지만 나는 30분 도착 예정이던 내가 15분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요즘 유명한 쉐프가 운영한다는 레스토랑의 음식은 당연히 훌륭했다 2시간이라는 모험 끝에 도착해서 그런건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와인도 한 잔 했고 인스타에 올릴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으니 배가 터질 듯 했다. 동생도 아까의 화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맛있는 음식들로 행복해보였다.


커피 한잔을 하고, 대로변으로 나왔다. 다시 지도앱을 켠다. 지도 앱의 우리집으로 가는 길의 색깔은 여러 가지 색이다. 파란색 버스를 탔다가, 초록색 노선의 지하철을 탔다가 도보로 10분을 걷는 길이다. 모두 낯선 것들이고 처음 타는 것들이다.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스물 넷, 처음 태국에서 구글 맵 어플로 맛집을 찾아해매던 내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맛있는 팟타이를 먹는 것도 행복했지만 맛집을 찾아가면서 지나갔던 길목들, 낯선 공기, 맛집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더 행복해게 만들어줬던 것 같다. 소풍 전날 밤처럼 말이다.


그 날 나는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팟타이를 만들어볼 요량으로 쌀국수와 땅콩분태, 숙주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여전히 제대로 된 요리도 못하는 나지만 두시간을 걸려 힘들게 모험을 한 나에게는 별 것 아닌 도전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토요일, 일찍 일어나서 쌀국수를 물에 불리고 강아지와 산책을 다녀왔다.

충분히 불린 쌀국수 면을 소스를 넣고 볶고, 계란 두개를 깨서 섞었다. 팟 타이. 태국을 볶다라는 뜻이란다.

마지막으로 숙주를 넣어 휘적휘적 하니 꽤나 그럴 싸한 비주얼이 완성됐다.


팟타이는 생각보다 쉽고 재밌는 음식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타마린드 소스를 넣어야 진짜 팟타이라던데 나는 굴소스를 넣었다. 예전의 나라면 그 소스를 살 때까지는 절대 팟타이를 도전하지 않았겠지만 백종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대체 가능한 소스로 대범하게 요리를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아삭한 부추와 새콤하고 달콤한 그리고 고추로 뒷맛이 살짝 매콤했던 나만의 팟타이는 진짜 태국인들이 보면 기함을 할만한 맛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맛있게 잘 먹었다.


여전히 나는 먼 여행을 계획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의욕도 없다. 매일 여전히 불안장애와 우울증과 싸우고 있는 30대 여성 직장인일 뿐이다. 하지만 두 시간 거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도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갔고 도전하기 힘들 수 있는 팟타이도 만들었다. 그때의 그 기분은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서 유명한 명소를 찾았을 때와 다르지 않다.


인생은 여행하듯 살아가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겠지만 나한테는 일상에서의 별 것 아닌 경험이 여행지에는 특별해지는 것처럼 일상 자체를 여행지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받아드려보라는 것처럼 해석된다.


매일 아침 출근길이나 회사에서의 일상, 주말에 쉬고 다시 반복되는 일상들이 내가 있는 곳이 4박 5일의 태국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매일의 반복이 맛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사가는 커피를 다른 커피로 도전도 해보고 매일 보는 동료들에게 더 밝게 인사도 해보고, 회사 뒷편에 그저 지나치기만 했던 산책로를 점심시간에 걸어보면서 어제는 못보던 새를 사진 찍어서 챗 지피티한테 물어본다 무슨 새야? 이런 새가 있었구나. 새로운 걸 배운다.

냉정히 말하면 회사일을 여행에 비유하긴 어렵지만, 맛집을 찾아가는 어려운 길목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하다. 물론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회사 자체가 맛집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힘들고 지루한 일상도 버텨볼 수 있다. 진짜다.


그나저나 완성도가 낮았던 팟타이는 다시 도전해보리라. (솔직히 좀 짰다)

남은 쌀국수 면은 충분했고, 타마린드 소스도 사보고 부추도 넣으면 좋겠다.

나는 나의 새로운 팟타이가 기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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