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가득한 맑은 눈과 쫑긋한 귀, 나비를 보면 따라가고 새소리가 나면 두리번 거린다.
우리집 막내, 리사는 이제 11개월이 된 믹스견이다. 태어난지 3개월차에 이모네에서 임보 중인 상태에서 만났고 우리는 한 번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모는 발 크기를 보라며, 엄청나게 클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랑에 빠진 우리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끼 강아지를 한 번 쯤 키워본 사람이라면 처음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사랑스러운 만큼 고통도 있었다. 강아지는 집 안의 모든 걸 다 물어뜯었고 낮에 하도 짖어대서 옆 집에 사죄의 마음에 쿠키도 돌렸다. 바닥에 떨어뜨리는 물건은 전부 리사 뱃속에 들어갔다. 귀엽다, 예쁘다라는 말 보다 하지마 안돼 기다려!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됐다.
하필 그 시기는 우리의 결혼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청첩장 모임이며, 드레스 가봉이며 집에 없는 날이 많았다. 하여, 그 작은 새끼 강아지를 (그렇게 작진 않았다) 예방접종이 끝나자 마자 우리는 강아지 유치원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사는 유치원에서 사회화를 잘 마치고, 결혼식도 성공적으로 올렸다.
4키로였던 리사는 어느새 14키로의 장성한 중형견이 되었고 우리집은 신혼 부부 집의 감성 인테리어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닥 색과 어울리지 않는 강아지용 매트를 깔고, 배변패드를 널려놓고 뜯어진 벽지 때문에 난리난 상태가 되었다. 방향제나 디퓨저가 강아지한테 안 좋다고 해서 선물 받은 디퓨저들은 모조리 서랍에 넣었다. 나름 향기로웠던 거실은 리사 냄새로 가득찼다. 털이 너무 날려서 검정색 옷은 꿈도 못 꿨다. 그거에 불만이 있었냐고? 있었을리가 없었다.
분명 리사가 치는 사고나 활동성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어린 강아지에게 어떻게 화만 낼 수 있었을까. 힘들게 퇴근하고 돌아온 날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우리에게 애교를 부리며, 두 발로 툭툭 쳐대며 사랑을 갈구하는 그 귀여움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댔다. 힘들어도 억지로 산책을 나가고 산책 나갔을 때의 엉덩이를 덩실거리며 걷는 모습, 호기심에 쫑긋거리는 귀,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점차 리사에게 더 푹 빠져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을 지나 창문을 열어 놓으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왔다.
결혼을 축하한다며 선물 받은 한우 세트에서 가장 기름기가 적은 안심을 꺼냈다. 단호박도 잘게 자르고, 안심도 잘게 잘라냈다. 최근 리사는 뭘 잘못 먹었는지, 아니면 바꾼 사료가 안 맞는지 배탈이 나서 계속 설사를 했다. 남편은 연애 때 마다 내가 배가 아플 때 마다 배를 만져주며, '내 손은 약손, 네 배는 똥배' 하면서 배를 만져주곤 했다. 그 애정 섞인 노래는 남편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그리고 할머님이 어머님에게 다정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해줬던 말들을 물려 받은 것이다.
아픈 리사를 위해 소화가 잘되도록 고급 한우와 단호박을 찌고, 뜨겁지 않게 식히는데 그 노래를 하는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가 안방에서 내가 있는 부억까지 들렸다.
'오빠 손은 약손, 리사 손은 똥배.' '리사야 빨리 나아라.' 안방에서 부엌으로 들리는 그 사랑 노래는 나에게 했을 때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졌다. 남편이 정말 리사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만큼 리사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남편이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사랑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
리사를 처음 우리 집에 데려왔던 순간이나, 우리가 결혼식을 사람들 앞에서 올렸을 때 보다 나는 그 날 저녁 우리가 가족이구나. 가족이 되었구나라고 느꼈다.
리사에게 식은 고기와 단호박을 주고 우리도 그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우리의 밥상에는 우리의 결혼 축하해주는 한우와 전라도 나주에서 남편의 할머니께서 담그신 파김치와 엄마가 방앗간에서 짜온 참기름 장을 같이 먹었다.
전라도 김치는 젓갈이 다른 지방 김치보다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젓갈 향이 강하다. 그리고 맵다. 처음 연애 초반에 먹었을 땐 엄마표 충청도식 김치에 익숙한 탓에 그 맛에 당황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맛에 익숙해졌고 심지어는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만 아껴서 꺼내 먹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은 참기름이 고소하면 너무 많이 깨를 볶은거라 발암물질이 나와서 몸에 안 좋다고 뉴스에 나오던데 우리집의 참기름은 여전히 고소하기만 하다. 색깔 다른 가지각색의 요리들은 재밌게도 잘 어우러진다. 동작구에서 나고 자란 공대 남자와 서대문구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던 여자, 강원도 원주에서 23년도에 태어난 털복숭이는 너무 달라서 분명 가족이 되기 전엔 걱정할 것 투성이었는데 이렇게 잘 지낸다. 오늘 저녁의 밥상처럼 말이다.
리사가 밥그릇에 코를 박고 밥을 먹는 소리를 기분 좋게 들으며, 우리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영원한 것 없다지만, 나는 이 영원하지 않을 행복에 감사하고 제대로 느끼고 보내리라 생각했다.
TMI로 리사는 그 다음날 아침 건강한 변을 봤다. 오빠 손은 약손이 통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