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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루비 Dec 17. 2024

올 해를 마무리하며 글을 씁니다

스테비아 커피믹스를 마시면서 이 글을 씁니다.

매장에 앉아 뜨거운 라떼를 두 손 쥐고 호호 불며 마시는 기분입니다.

어디 뉴욕 스트리트에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줄 서서 먹는 카페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타인에게 좋은 행동을 했던 거 같습니다.

월세를 1월부터 내고, 자동차 학원에 등록 후 면허취득, 자동차 보험, 취등록세까지…

주머니에 쓸 만큼만 겨우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멀었죠.

늦은 나이에 면허를 따느라 창피하기도, 배움이 느려 보충수업도 받았지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올해 저는 세종에도 살았습니다.

지금은 면 단위에 거주 중입니다.

전 직장이 분당에 있어 잘 갖추어진 인프라가 더 그립네요.

걸어서 조금만 가면 코 닿을만한 스타벅스가 두 군데, 아니 세 군데가 있었습니다.

간혹 선물로 받은 기프티콘을 교환하고 두 손 가득 케이크와 따뜻한 커피를 사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메가커피 정도 있어 커피 수혈하며 한 해를 버텼네요.

올해는 운전면허/공공기관 취업 등 표면적으로는 원하던걸 많이 이룬 거 같습니다.

실상은 월세/자동차세/적은 월급 그리고 공무직의 여러 가지 단점에 부딪혀 힘이 들었습니다.

뭐든지 직접 부딪쳐봐야 아는 걸까요?

끌어당김의 힘을 믿었고, 원하던 바를 이루었는데 기대만큼 만족스럽진 않네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 놀랬습니다.



그리고 줄어든 생활비만큼 경험하지 않았던 극도의 절약을 했습니다.

많은 걸 포기해야 했어요.

비싼 커피, 달고 맛있는 베이커리류.

->가장 포기하기 싫었던 1순위

메이커옷들과 신발.

->저희 엄마는 제발 그 나일론 옷 좀 그만 입으라 잔소리하십니다. 저렴한 옷은 폴리 혹은 나일론 혼방이거든요.

책과 잡지.

->원래 지적인 사람은 아니고, 문화생활을 나름 하는 편이었는데 포기했습니다.

좋아하는 값비싼 화장품류, 향수, 디퓨져 등등.

->향수를 포기하고 섬유탈취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잘 고르면 명품 향수 비슷한 향도 나는 것 같고, 나쁘지 않더라고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생활비 70만 원에서 42~43만 원 정도로 줄였으니, 근 27만 원 정도 줄인 셈입니다.

저 정도 금액을 줄였으니 생활이 박살 나거나 질이 급격하게 줄어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전엔 재고도 많아 다 쓰지도 못하고 버리는 제품도 많았습니다.

1인가구인데도 배송비 때문에 여러 개를 사곤 했거든요.

생활비가 부족하다 보니 세일/최저가 PB제품을 주로 구매했습니다.

또 필요한 건 셀프로 만들거나 직접 설치, 사용했습니다. 특히 염색은 직접 했는데 가성비 좋더라고요. 요리도 하고, 앞머리도 자르고 직접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고 비싼 물건은 크게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적은 물건을 아끼고 낭비 없이 살아가는 게 더 보람찬 일이라는 것도요.

필요 없거나 재고가 많이 쌓여있는 물건, 옷은 우선적으로 엄마를 드립니다. 가족이 많아 누군가는 요긴하게 쓰시거든요.

안 쓰는 물건은 기부하거나 버리면서, 얼마나 낭비가 심했는지 반성했습니다.





생활비를 많이 줄인 탓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습니다.

사던걸 못 사게 되니 억울하고 분통함에 눈물도 나고, 배달음식을 과식도 해서 살도 쪘네요.

금전적인 부분을 만회하고자 주식의 주자도 몰랐던 제가 ETF, 해외채권, 국내외 주식, 카드테크 등 다양한 경험도 했습니다.

아, 연금복권도 꾸준히 샀고, 고향사랑 기부제에 참여도 하여 답례품도 받았어요.

생전 처음 고양이와도 친해져 꾹꾹이도 받아봤습니다.

고양이는 뜻하지 않았던 인연이라 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블로그도 하고, 우연처럼 글솜씨를 좋게 봐주시는 분을 알게 되어 브런치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하고 글을 읽는 누군가가 생겨서 너무 기쁩니다.

남들보다 많이 느린 제가 할 수 있는 건 절약밖에 없었습니다.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게 제 생존전략 키워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렸을 적 살았던 마을을 생각해 봅니다.

마당이 딸린 작은 집에서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화장실은 야외를 개조해서 만들었는데, 지금같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면 물이 얼고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수도 앞에는 비누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배고픈 쥐들이 가끔 뜯어먹어 잇자국이 보이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평생 맞벌이를 하셔서 찌들어 있으셨고, 평일 늦게 또는 주말에도 나가서 일을 하셨습니다.

누군가 저를 감정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죠.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하는 때와 맞물려서 그런지, 20대부터 60대까지 쉬지 않고 일한 삶을 보답을 받으셨습니다.

부모님은 자신의 주변에서 경제적으로 나은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지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리고 노동의 힘을 믿으셨죠.



그에 비해 저는 세 살 이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심하게 아팠습니다.

유전병으로 밝혀진 천식을 앓았고, 저 세상 문턱까지 저를 끌고 갔습니다.

아버지 쪽에 천식으로 돌아가신 고모가 있었는데, 그분을 제가 닮은 거 같다고 합니다.

아픈 저를 살리겠다고 부모님은 그 당시 건물 한 채 정도 하는 약값을 지불하면서 병원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겨우 살아난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운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죠.

무난하다고밖에 표현을 못하겠네요.

대학을 졸업 후 시작된 최저 임금의 학원 보조강사로 일한 시간들은 가난의 세계로 저를 끌고 갔습니다.

가계부를 적을 수밖에 없었고, 아니 적어도 늘 생활비가 부족했어요.

아파트에는 단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었고 허름한 빌라 한 칸에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내 취향과는 상관없는 벽지, 낙서, 모기 잡은 자국...

지은 지 수 십 년 된 방에서는 누군가의 흔적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나 아무런 불평을 할 수가 없었어요.



어렸을 때 병마와 다투고, 지금은 절약하는 삶을 삽니다.

아니, 절약보다는 어떠한 연(물건, 사람, 동물 등)이든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들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건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과 저는 무언의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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