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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희 Nov 11. 2022

메리 선생님(Marry teacher)

은퇴가 준 선물

남편의 은퇴와 맞물려 나 역시 교직 생활을 마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집을  줄이기로 했다.

아이들도 독립해서 큰 집이 필요 없기도 했고 집 관리와 세금이 부담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살았던  단독 주택을 팔고 타운 하우스로 옮기면서 아쉽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뭔가 생활이 간편해져서 좋았다.

집 세금만도 큰 집에 살 때는 일 년에 2만 불이 넘었는데 타운 하우스로 옮기니 삼분의 일 정도로 줄어들어 여유가 생겼다.

집 정원이 아담하고 예뻤고 무엇보다 시카고의 긴 겨울 동안 눈을 치우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단독은 눈 치우기, 집수리, 잔디 깎기 등  일이 산더미인데 타운 하우스는 관리해주는 곳이 있어서 편리했다.


 긴 세월 동안 열심히도  사느라 거울도 제대로 안 봤는데  요즘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젊은 나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늙은 여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서 낯설다. 금발은 어느새  흰색으로 변해있고 머리숱도 허술해졌다. 짙은 파란 눈동자도 흐릿해지고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주름도 점점  늘어  더 늙어 보여 쓸쓸하다.

목소리마저 노인이 되려는지 약간 허스키해지고 걸핏하면 사레가 잘 든다.

그나마 아이들 다 결혼시키고 두 사람의 연금으로 충분히 살 수 있으니 열심히 산 보람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은퇴를 꿈꾸며 일했지만 은퇴 자유와 즐거움만 주는 게 아니라 긴 하루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늦게서야 알았다. 매일 운동도 하고 TV도 보고 가끔 여행을 해도 시간이 너무나 더디게 가는 것 같아서

여유 시간 동안 지역 대학에서 이민자들이나  외국에서 직장 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무료 영어 실(ESL)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강의를 하기로 했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강의료도 나와서 용돈도 되고 보람도 있는 일이라 강의를 맡게 된 것이 즐거웠다.


세계 여러 나라의 학생들을 볼 때마다 참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어쩌다 이 낯선 곳으로 왔을까 궁금해서 자기소개 시간에 진지하게 듣곤 한다.

나의 첫 학생들은 나이 든 변호사랑 결혼한  주부인 태국인, 역시 주부인 한국인 ,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하는 이란인, 바느질 일을 하는 멕시코인, 여군이었던 몽고인, 우크라이나  새댁, 러시아 화가 모두 8명의 여자들과  IT 일을 하는 인도 남자 한 명이었다.

그들과 일주일에 한 번은 대면으로 한 번을 줌으로 수업을 하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영어를 모르던 학생들이 영어로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나 역시 이민자인 태국 출신 남자랑 결혼을 해서인지 이민자들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태국 남자랑 결혼한 백인 여자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과 다를 바 없을까?'궁금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을 수업을 하다 보니 난처한 상황들이 생기기도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우크라이나 출신 아름다운 새댁 리사와 러시아 화가 사이의 묘한 상황 앞에서 당황스럽고  말을 조심해야 하는 일이 있다. 학생들 역시 리사의 가족 걱정과 위로를 전하며 러시아의 침략을 비난하다 러시아 화가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

 살아있는 작은 세계가 한 교실에 모여있어서 흥미롭고 때로는 조심스럽다.


매 학기초 교재 구입과 독서할 책을 구매해야 하는 학생들을 위해 내 강의료로  한 사람당 50달러 정도의 책을  사서 그들에게 선물했더니 학생들이 모두 깜짝 놀란다. 철저히 개인주의자인 미국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들과 대화하고 때로는 각 나라의 음식을 해와서 파티를 하고 날씨 좋은 날에는 소풍도 하면서 지내는 일이  늙어가는 나를  지금 이 시간에 멈추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좋다.

구글로  다른 나라의 문화나 뉴스를 찾고 공부하는 시간도 생겼다.


이 모든 것들이 은퇴가 준 선물인 것 같다.

은퇴는 오래 살아온 집을 줄여야 하는 일과 시간이 너무 많아  늙은 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기도 하는 쓸쓸한 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나도 나이고 늙은 나도 나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전환의 때이기도 하고 ESL 교실을 맡게 되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한걸음 들어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각기 다른 억양과 말투로'메리 선생님'하고 불러주면 짜릿하고 기쁘다.

그들이 이 낯선 곳에서 의사소통을 못해서  어려움에 처해 헤매지 않도록 안내하는 따뜻한 불빛이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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