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나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평생 함께 살 나를 이해할 자는 나 자신뿐입니다.
학교교육에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힘을 심어주는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는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먼저 심어주고 통제 안에서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경멸입니다. 연쇄 살인마들의 어린 시절은 하나 같이 부모의 가혹한 학대와 건강한 가치관을 공유할 집단이 없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차별과 왕따, 폭력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칠 선생님 또한 없었습니다. 지속적으로 가혹한 폭력과 비난을 순수하고 예민한 어린이가 받았다면 그 누구도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줬다면 좋았겠지요.
실제로 타인은 나 자신 만큼 나를 사랑하거나 깊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타인들도 똑같이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회에 거스르지 않는 인간으로 살기에 바쁩니다. 그러다 연인이 생겨 나를 받아주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다 좋아하는 연인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섭섭하고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랑하던 마음이 어느 사이인가 배신감과 미움으로 바뀌곤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바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의 근원은 나의 것이지 그의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내 안에 사랑을 느끼는 능력이 있어 대상이 나타났을 때 발현된 것입니다. 내 안에 사랑을 느끼고 이해하고 아껴주는 마음은 내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불러내 주는 사람을 통해 본연의 내 사랑이 발현되는 것이므로 실패한 관계로 내 능력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상에 따라 잘 맞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키울 대상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내면에 있는 사랑의 능력을 실패했다고 스스로의 사랑까지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왜 외부의 대상에게 사랑을 구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평생 버릴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인 나는 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조금만 깨어서 바라보면 완벽한 이타적인 행위도 없지만, 완벽한 이기적인 행위도 없습니다. 올고 그름은 주관적인 것이며 진리의 통합된 시선으로 보면 옳고 그름은 지나가는 손님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하는 태도로 발전하는 것은 극단적인 자기학대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애정을 갈망하기 전에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을 연인처럼 사랑하고, 연인과 함께 할 때는 나눔을 맛보는 것이 내 존재의 중심에 균형감을 갖는 태도입니다.
존재계는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은 삶에게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사는 창조의 자유의지와 신성을 부여받은 유일한 존재 입니다. 우린 종종 위대한 선지자나 깨달은 사람이라면 뭔가 특별한 존재로 프레임을 씌우고 존경의 눈빛을 보냅니다. 외부로 보내는 이 존경심은 내 존재 안에 있기에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신성은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극한 존경심과 사랑으로 느끼도록 노력해 봅니다.
내가 특별할 것이 없는데 중생에 불과한데 어떻게 존경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내 안에도 그들과 똑같은 신성을 조건 없이 먼저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 보는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난 인격은 가변적이며 나의 전부가 아니므로 부족한 부분 때문에 존경할 수 없다는 생각은 완벽해야 존경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인격은 완벽할 수도 없고 설령 완벽하다면 존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죽을 때까지 나라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되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바로 하나이기에 붓다의 불성과 예수의 신성은 우리 안에도 살고 있으며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욕망에 찌들고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존경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바로 생각 차원입니다. 그 마음 너머에 생명과 존재에 대한 존경심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존경의 마음이 자라나면 더 멋지게 사는 연습을 하게 되고 내 몸과 마음의 파동이 긍정적으로 높아집니다. 오만하게 자신을 추켜세우는 태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의 순수한 존재의 느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