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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생일에 숨겨진 비밀

by 노크

엄마 뱃속에서부터 세상을 향해 발길질고 더 넓은 세상과 깊은 성찰을 위해 수 없이 노크하고 달려 왔던이 어느새 육순이 되었네요.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며 지난 60년을 회고해봅니다. 기억이 가물한 유아기 때부터 학창시절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삶이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아니었다해도 괜찮다. 나는 반딧불처럼 빛나니까. 삶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자가치료를 하듯 끄적여 두었던 글들을 하나씩 연재하려합니다. 보잘것없거나 때론 부끄러운 글들이지만 괜찮다고 다독여봅니다. 삶이 원래 그런거니까.





나는 실제 생일과 호적 생일이 다르다.

60년 가까이 면서기의 실수였나 보다 했던 생일이 어느 날 문득 이상하게 느껴졌다.


‘가을이 생일인데 왜 주민등록상에는 봄으로 출생신고가 되어있는 것일까?’

호적생일은 3월이고, 실제 생일은 9월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행정 시스템이 잘 정비되지 않은 그때 이름도 생일도 면서기의 실수로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영아 사망률도 높았고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딸을 낳으면 출생신고를 늦추거나 아예 하지 않은 일도 빈번했었다. 나도 태어난 해를 지나 그다음 해 봄이 돼서야 겨우 출생신고를 한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부모님이 소천 하셔서 확인할 수도 없지만 어려서 언니들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엄마는 삼대 독자인 아빠와 결혼했고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집안에 안타깝게 첫 딸을 낳았단다. 그것도 쌍둥이를 말이다. 지금이야 쌍둥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콘이지만 그때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이어 다행히도 큰오빠인 아들이 태어났고 둘째 오빠까지. 그리고 다섯째로 내가 태어났단다. 할머니는 또 딸을 낳았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내다 버리라고 했단다. 아들이 이미 둘이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난 찬 바닥 저 모퉁이 한쪽에 밀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내 이름은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쌍둥이 언니들이 학교에서 제일 이쁜 이름을 가져와 붙여 주었단다. 부모에게 이름도 제대로 지음 받지 못했던 아이. 그 아이에게 엄마는 젖이라도 마음 편히 물릴 수 있었을까?

가난한 살림에 더는 고향에 살 수 없어서 아버지는 자식들을 끌고 상경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시골집에 남았다. 난 그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언니 오빠들, 나와 3살 차이 나는 남동생까지 모두 서울로 갔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가장 미움을 받아 이름도 제대로 지음 받지 못한 나는 할머니 곁에 남겨졌다.

할머니가 적적할까 봐 나를 할머니 곁에 두고 갔을까? 아니면 아직 어린 나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할머니께 맡기고 갔던 걸까? 후자가 맞는다면 왜 어린 남동생은 데리고 갔을까? 아마 동생은 두세 살이라 너무 어려서 떼놓을 수가 없었나 보다.


가족들과 헤어질 때 어린 나는 얼마나 울었을까? 내 나이 겨우 네다섯이거나 대여섯 어간이었을 텐데. 그런 나를 떼어 놓고 가는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아이들을 키워보니 그 모습이 상상이 간다. 나는 따라간다고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고불고 온몸으로 떼를 썼겠지. 모두가 떠나 버리고 휑한 집에서 어린 계집애는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TV는 생각도 못 하고, 장난감도 없었고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없던 시절.




이후에 국민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을 했고 할머니도 함께 왔다. 얼마 동안 시골에서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가족을 만난 나는 얼마나 기뻤을까? 전기도 없던 시골구석에서 호롱불을 켜고 때론 밝은 달을 빛 삼아 살던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에 오니 또 얼마나 신기하고 좋았을까? 언니 오빠들은 나를 반가워했을까?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지만 떨어져 산 세월 때문에 낯설어하거나 어색해하지는 않았을까? 왜 나만 떼 놓고 갔냐고 부모님에게 떼쓰며 어리광을 부리진 않았을까? 기억은 없다. 다만 부모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던 것 같다.

연탄장사를 하던 부모님을 따라 연탄공장에도 갔고, 배달하는 집마다 따라다녔다. 외상값 수금 가는 엄마를 밥 먹다 말고 따라갔다. 떨어져 있던 세월만큼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던 게 아닐까? 이제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으로 고착된 건 아니었을까?


늘 부모 곁에 있으려면 부모에게 필요한 아이, 쓸모 있는 아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늘 옆에 두고 나를 예뻐할 수 있을 테니. 난 부모에게 순응했고 부모님이 예뻐하도록 행동했을 거다. 우리 딸 최고라는 칭찬 소리를 듣고 싶어 하며.


쌍둥이 언니들은 자신들의 길을 찾아 일찍 결혼했다. 아마도 어려운 살림에 입하나 덜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가난으로 지긋지긋한 본가를 떠나 잘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큰오빠와 작은 오빠는 이런저런 일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부모는 가난했고 일찍 시집간 언니들은 자신들 살기에도 바빴고 오빠들은 서로 싸우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그때 난 여고생이었다. 그나마 나를 엇나가지 않도록 잡아준 건 신에대한 어린 믿음과 가냘프고 고단한 아빠의 뒷모습이었다.


늘 불쌍하고 가련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걸렸다.

삶이 고단한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은 못 돼도 근심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춘기도 속으로 삭인 것 같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결혼의 기쁨보다는 부모를 두고 가야 한다는 마음에 마냥 즐겁지 만은 않았다. 결혼식 날도 눈이 붓도록 울었다.


대부분 사람은 아빠를 어려워하는데 난 아빠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친구들은 아빠와 친한 나를 많이 부러워했다. 내가 아빠의 성품과 많이 닮기도 했으며, 아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늘 아빠의 뜻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는 많은 걸 나와 상의했고 나도 힘들 때는 아빠에게 털어놓았다.

암과 투병하는 아빠 곁에서 그 모든 걸 지켰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를 챙기는 일도 내 몫이었다. 엄마도 다른 자식보다 나를 좋아했다.


‘형제가 여섯인데 왜 이 모든 일을 나만 해야 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누가 한다 해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거다. 힘든 시간만큼
부모에게 더없는 사랑을 받았다.


늙고 병든 부모를 섬기는 일은 자녀 된 당연한 도리이며 부모님이 나를 키워준 것에 감히 비교할 수 없이 미약한 정도다. 하여 부모에게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본다. 많은 형제 중에 유독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서 부모에게 잘했던 걸까? 아니면 부모에게 잘했기에 사랑을 많이 받은 걸까?

부모님이 소천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 와 왜 갑자기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그때의 나를 조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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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최은희 작가의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림책》을 읽었다.

그 작가와 나의 어린 시절은 거의 같았다. 부모와 떨어져 살지는 않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냉기 도는 윗목에 놓였었단다. 그 이후에 그는 부모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사랑받는 아이가 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고 한다. 자신의 내면을 알고 난 후 힘겹게 살아온 인생을 위로하며 쓰다듬었다고. 나아가 자신의 상처가 자녀에게 투사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설 속의 바리데기 공주를 예로 들었다.

그 책을 읽고 가만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책의 내용대로라면 그간의 나의 행동이 부모를 사랑해서 부모를 섬기고 자식 된 도리를 다한 게 아니라 또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부모의 뜻에 순종하고 부모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다는 건가?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와 어린 시절의 양육 경험을 통해 지금의 나를 직면하게도 한다. 그러나 나의 지난 시간이 그들의 해석처럼 무의식에 의한 발로였다 해도 내 삶이 별반 달라지는 건 없다. 그들의 해석대로 나의 출발은 부모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 어떻게든 부모에게 사랑받으려고 발버둥 친 거라면 그건 나에게도, 부모에게도 얼마나 전화위복의 기회였던가? 나의 아픔이 모두에게 복이 되었다. 느끼지도 못했던 아픔이 복이 되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버겁기는 했지만 후회해본 적도 없다.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했으며 그게 내 삶이라고 믿었다. 부모를 섬기는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자식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였다. 그로 인하여 내 삶은 이야기 거리로 풍성하다. 일 년에 두 번의 생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특별하지 않은가?

책을 읽으며 했던 깊은 사유는 이제 정리가 됐다. 잠깐 나를 흔들었으나 나는 나로 돌아왔다.

‘나의 가장 약한 것을 통해 나를 나로 빚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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