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어머 앵두나무다. 몇 개 따먹고 가자”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구례 오미 마을을 지날 때였다. 함께 걷던 지인이 앵두나무를 보고 말했다. 우리는 게눈 감추듯이 길거리 앵두나무에 코를 박고 먹었다. 저만치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의 앵두 서리는 막을 내렸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오랜만에 먹은 앵두 맛에 우리는 즐거워했다. 둘레길을 걸으며 봄에는 앵두와 산딸기를 가을엔 야생의 오디를 따먹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그런다 문득 어린 시절에 맛있게 먹었던 앵두가 기억나 속으로 베시시 웃었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집은 초가집으로 반 두 칸 그리고 부엌과 조그만 텃밭이 있는 옛집이었다.
그런 우리 집 앞엔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잣집이 있었다.
그 집의 대문에는 어른이 된 후에야 이름을 알았지만, 주황색 능소화가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그 집은 넓은 정원이 있었고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숲을 이루는 듯 보였다.
저녁을 먹고 툇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으면. 노란 달빛에 앞집의 나무그림자가 우리 집까지 길게 드리워지곤 했다. 바람 세차게 부는 날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무서워
어린 나는 할머니 치마를 붙잡고 떨던 기억도 난다.
어느 날은 아이들 소리도 났고 어느 날은 사람들 웃는 소리가 크게도 들리던 그 집은 내게는
비밀의 화원같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국민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대궐 같은 집에 살았던 거인 이야기를 읽을 때도 그 집을 상상했고. 그림을 그릴 때도 그 집을 상상하며 그렸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할머니와 둘이 만 살던 내가 서울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그 집의 풍경을 동경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텃밭에 상추며 오이, 고추 등을 가꾸던 할머니는 넘치는 상추와 고추들을 이웃에 나누어 줄 때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때 처음으로 상추와 고추가 든 바구니를 들고 그 집에 할머니 심부름을 갔다.
우리 집과 다른 커다란 대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선 후 그 집 마당을 한 바퀴 죽 둘러보았다.
여름의 하오에 햇살이 마당 가득 졸린 듯 쏟아지고 있었다. 초가집과 달리 뭔가 잘 정돈된듯한 집은
임금님이 사는 대궐이 있다면 이런 곳이구나 싶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당 한쪽에 세면으로 네모지게 발라 만들어진 수돗가였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에 모여 두레박으로 물을 떠 빨래도 하고 채소도 씻던 때였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앞집은수도가 있어서 우물에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말한 수도가 저건가보다 싶었다.
저기서 어떻게 물이 나오지? 하는 생각도 잠시, 수돗가보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수돗가 옆의 앵두나무였다. 키가 크지 않은 앵두나무에는 빨간 앵두가 정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할머니의 속바지 주머니에서 가끔 나오던 알사탕보다는 작지만, 빛깔은 더 고왔던 앵두는 바람에
흔들리는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어서 와서 먹어봐”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상추 바구니를 수돗가 옆에 팽개쳐두고 앵두를 따 먹기 시작했다.
먹을게 귀했던 그 시절 여섯 살 짜리 여자애가 얼마나 맛있게 앵두를 따 먹었던지.
허겁지겁 씨를 뱉는 둥 마는 둥 하며 국물을 옷자락에 흘리며 따먹은 앵두는 이후에 어디서도 맛볼 수
없었던 황홀한 맛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야 너 누구야?“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나보다 키가 조금 큰 남자애가 서 있었다. 앵두 국물로 입은 지저분하고 머리는 바가지 머리로 촌스러운 여자애가 바라본 남자애는 나와는 전혀 다른 차림의 모습이었으며,
얼굴이 하앴다는 것 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의 것을 훔쳐 먹다 들킨 아이처럼(사실 그랬지만) 얼른 그 집을 도망쳐 나와 집으로 뛰어갔다.
상추 바구니는 까맣게 잊은 채.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 놀러 온 그 집주인의 손주였다고 한다.
서울사람은 뭔가 우리와 다르다고 순간 느꼈다. 뭣도 모르는 어린 나였지만 그 애가 자꾸 궁금해졌다.
우리 집 툇마루에서 까치발을 하고 나무 넘어 그 집 마당을 보려고 애써도 봤지만,
나무가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다. 그 애도 내가 궁금할까? 생각도 했다.
며칠이 지났다. 대문도 없는 우리 집에 상추와 고추를 담아 심부름 보냈던 바구니에 사탕 몇 개,과자 몇 개를 담아 그 애가 우리 집 툇마루에 올려놓으려했나보다. 순간 부엌에서 할머니가 나오다 그앨 봤나보다.
“니 누꼬?”
“아 나무 많은 집 순주구나 ”
나는 방에서 나와 그 애를 바라봤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애는 그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뒤도 않 돌아보고 뛰어갔다.
나는 그때 왜 뛰어왔고 그 애는 또 왜 뛰어갔을까?
그때 우리가 친구가 됐다면 나도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
때가 있다. 이후 그 애를 보지 못했다.
얼마 후 나는 아빠를 따라 서울로 갔다. 국민학교 입학을 위해서였다. 이후에 할머니도 손을 다쳐 더 혼자 계실 수 없어 서울로 오게 됐다. 그렇게 서울살이는 시작됐다. 할머니와 둘이서 무서운 밤을 맞이하다가 언니가 둘이고 오빠가 둘이며 남동생도 생기니 너무 좋았다.
사는 게 바쁜 나날이었지만 가족이 많아서 좋았다. 능소화가 활짝 핀 비밀의 화원 집에서 들었던 웃음소리가 가난한 우리 집에서도 들렸다. 나를 예뻐해 주셨던 할머니도 좋았지만, 엄마 아빠가 있어서 더 좋았다.
나를 좋아하던 바둑이도 있어서 더 좋았고.
결혼하고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고향집에 들렀을 땐 할머니와 살던 그 초가집은 빈가가 되어 방치돼있었다. 나무가 많았으며 능소화가 주렁주렁 피었던 신비의 집. 수돗가 옆의 앵두나무가 있던
그 집은 그리 크지도 않더라.
고향에서 산 시간은 채 7년 정도가 전부이고 고향을 떠나 서울사람으로 40년 가까이 살았다.
정들면 고향이라지만 어린 시절 대궐 같은 집과 그 집의 웃음소리를 동경했던 고향의 추억은 오랫동안 따듯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애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앵두를 따 먹다 놀란 추억이 빨간 앵두만큼 익어가는 나이가 됐는데도 기억나는 걸 보면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