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오셨다
할머니와 둘이 살았던 집은 일반적인 그 시절의 초가집으로 길게 방이 두 개 붙어 있고 그 앞으로 마루가 있는, 그 마루 밑은 창고처럼 호미며 곡괭이며 잡다한 것들을 넣어두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키웠던 강아지도 그곳에서 살았던 희미한 기억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어서 부지런한 할머니는 상추며 고추 등을 키웠고 난 가끔 그것들을 이웃에
배달하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우리 집 한편엔 돼지우리가 있었고 그 돼지우리와 연결된 이웃집엔 키가 큰 나무들이 많았다.
돼지우리에 돼지를 더 이상 키우지 않았기에 돼지우리는 을씨년스러웠고, 밤이면 나무그림자들이 어린 내 눈에는 온갖 무서운 귀신의 형태로 변해서 내게 달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화장실을 한번 가려면 그 나무 유령들이 무서워서 할머니를 깨워야 했고 때론 요강을 사용하기도 했다.
달이 훤히 밝은 초저녁에는 마루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는 데
그때 나는 할머니와 무슨 얘기를 했을까? 싶다.
아마도 서울 사는 엄마와 아빠가 그리고 형제들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 집의 돼지우리와 그 집의 키 큰 나무들이 서로 맞대어 담으로 이어진 앞집은 대문이 아주 컸고 그 대문엔 언제나 예쁜 꽃넝쿨이 가득했던 기억인데 마을사람들은 그 집을 부잣집이라 불렀다.
그 부잣집엔 여러 사람들이 자동차라는 것을 타고 오가는 것을 윗집에 사는 나도 자주 보았다. 그때마다 우리도 그들도 옷을 입고 있었지만 뭔가 그들이 입은 옷과 우리 가입은 옷엔 차이가 있음을 어린 나의 눈에도 비쳤고 왠지 피부색도 뽀얀 것이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게서는 이상한 빛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 집에서 나는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궁금했고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돼지우리에 들어가 키 큰 나무 사이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다.
난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무심히 지나간 어린 시절인 것
같은데 그 시절 난 얼마나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 같다.
부모와 형제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난 할머니와 둘이 살아야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과 가난까지야 모르겠지만 부잣집의 모습과 다른 내 삶의 모습에 말로는 표현 못할
어린아이의 슬픔이 검고 큰 눈망울에 젖어들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시골집에 어린 딸도 보고 당신의 어머니도 뵐 겸 왔었다.
그때 아빠는 자동차 장난감을 사 왔다. 이제 생각하면 그것도 궁금하다. 왜 여자이아인 내게 아빠는 자동차 장난감을 사다 줬을까? 뭐 여자아이인형이나 동물 인형이라든지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닌 하필 자동차 인형이었을까? 그때는 그런 생각도 없이 그저 난 그 장난감을 좋아했건 것 같다.
시골 구석에서는 볼 수 없는 장난감이었을 테니까.
그 노란색 자동차는 줄을 끌고 가면 흔들흔들하며 나를 따라왔던 것 같다. 아마도 내 일생에 단 한 번 받아본 장난감다운 장난감이지 않았나 싶다.
그 시절의 장난감이란 그저 돌멩이 공기 알이었고, 누가 쓰다 버린 (동동)구르무병을 주워 밥그릇으로 썼고
깨진 벽돌을 가루 내 고춧가루라며 소꿉놀이를 했던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아빠는 하룻밤도 자지 않고 서둘러 돌아갔던 것 같다.
그 자동차 장난감 하나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따라가고 싶은 어린 딸의 마음을 달래 놓고 아버지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아득히 사라져 갔다.
아마도 난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보다는 생전 처음 보는 노란색 자동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아빠가 간걸 안 후에는 또 얼마나 서럽게 울었을까?
난 왜 안 데리고 갔냐고? 엄마 보고 싶다고. 나도 서울 가고 싶다고
어린 나는 떼를 쓰며 울지 않았을까?
그때 떼를 쓰며 운 기억은 없는데 지금 그 어린아이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평생 떼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두고 돌아가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 부모가 된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는 서울까지 가는 내내 차 안에서 눈물 없는 울음을
쏟아냈을 것이다?
아버지 묘에 가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냐고.
이따금 내가 애들에게 집착한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그때의 버림받은 어린아이감정을 투사하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했던 영유아기에 경제적 이유로 부모와 함께 살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
그 시절엔 부모와 헤어져 고아원으로 때론 형제와도 헤어져 각각 다른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해외로 입양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거지가족도 많았다. 입하나 줄이겠다고 언니들은 이른 나이에 부잣집에
식모살이를 갔고, 때론 밤 낮 없이 돌아가는 미싱 공장에서도 일했다.
비록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살았지만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그렇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감사해야겠다.
때로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고 위축되며 작아지는 나를 볼 땐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이 애정의 갈증으로 남아 아직 치유되지 못한 어린아이가 내 안에
울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다행히 얼마 후에 난 서울로 와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형편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결심도 아닌 할머니의 팔목부상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넘어지셔서 손을 다쳐 깁스를 했기 때문에 어린 나를 돌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소위 시골 촌년이 서울에 와서 서울깍쟁이가 되려는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