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 연탄과 삼표연탄
우리 가족은 3대가 모두 9명이었다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6남매.
방 2칸짜리 판자촌에 살았다. 하나있는 화장실은 동네 공용이었다. 그때는 변소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몸으로 할수있는 일 연탄 배달을 했고 엄마도 그 일을 도왔다.
물론 쌍둥이 언니 둘은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아마도 재봉 공장에 다닌 것 같다. 그리고 큰 오빠도 기타 줄을 만드는 공장에 다녔고 나와 위의 둘째 오빠만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아마 막냇동생은 아직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리어카라 했던 공장에 가서 손수레 가득 연탄을 받아와 주문받은 집에 일일이 배달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살았던것같다
가끔은 나도 엄마·아빠를 따라다녔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이 있는 왕십리의 동원연탄과 삼표 연탄공장에서 연탄을 수레 가득싣고 오는 길엔 철도가 지나가는 다리가 있었고 우리는 그 다리 밑의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하고 내려간만큼 또 올라가야 했다.
내리막길을 연탄을 가득 싣고 아무리 버티려 해도 그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발이 쏜살같이 달려내려 간다.
그리고 그 힘의 반동 때문에 얼마는 오르막길을 올라 갈 수가 있지만, 오르막의 끝은 그 무게로 인해 더 힘들다. 아빠와 엄마는 아마도 매일 같이 그 길을 오르내리며 내리막에서는 발을 어찌할 바 몰라 발버둥 거렸을 것이고 오르막의 끝에서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리려 애를 썻을 것이다.
아직 학교에 입학도 안 한 나는 부모님을 따라 그 내리막과 오르막을 내달렸다가 올랐다.
‘그 쟁쟁 걸음의 어린 계집애가 얼마나 발버둥을 치며 그 길을 내려가고
올라갔을까 ?’
그런 내가 너무 안쓰럽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엄마·아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지않았을까? 아니면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 따라갔는데 그런 어려움인 줄 몰랐을까?
지금 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동학대라고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기억한다 그 슬픈 날을.
엄마가 사준 보라색 벙어리장갑. 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두 장갑끝을 묶어 목에 걸어주었는데 그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손수레의 뒤를 밀 때 내 장갑이 손수레의 바퀴에 끼어 들어가서 그만 장갑에 검은 기름이 묻고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새것이고 예뻐서 얼마나 아끼던 장갑이었는데.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미안해하셨다. 새로 사준다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어린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집 저집을 다니며 엄마·아빠는 아무 도구도 없이 당신들의 몸 하나로 연탄을 3~4장씩 손으로 들어 배달을 하곤 했다.높은 언덕위의 집은 지게에 연탄을 지고 배달하기도했다.
난 문간에 앉기도 하며 아빠·엄마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집에서 어떤 남자애가 밖으로 나가려고 뛰어나오다가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잠깐 위아래 훑어보다가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밖에 그지 왔어. ~
아마도 그 남자애는 얼굴에 연탄의 시커멓게 묻고 행색이 그래 보이니 그 시절 여기저기 밥을 얻으러 다니던 거지가 많은 시절이라 아마도 나를 거지라 생각했나 보다.
바보같이 그때 난 아무 말도 못했던 것 같다.
지금 같았으면
“ 나 거지 아니거든 ”
사납게 소리를 질렀거나 한 대 꿀밤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 연탄 배달을 업으로 사셨던 가난한 엄마 아빠는 아홉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려 애쓰셨다. 그 후에도 길거리 과일장사와 야채장사등으로 언니오빠를 결혼시키고 나와 동생을 대학까지 가르치셨다. 그 덕분에 우리형제들도 지금까지 잘 살아 올 수 있었다.
지금은 구경조차 쉽지 않은 연탄
안도현시인이 말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