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애완견을 가족의 일부처럼 키우는 시대다.
그래서 애완견도 아닌 반려견이라 부른다. 개 주인을 엄마니 아빠니 누나니 하고 부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50년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는 닭 몇 마리를 키우듯이 개 한 마리쯤은 키웠다.
개를 키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름 복날에 몸보신을 위한 식용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슬픈 그림은 오토바이에 철장을 싣고 다니면서 개 삽니다~ 개 삽니다~ 외쳤던 개 장수의 목소리와 어느 여름 날 동네 아저씨가 개를 잡는 모습이다.
그때는 보신탕이라며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값싸게
얻을 수 있어서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면서 개고기를 먹는 문화는 점점 쇠퇴하여가고 방송에서도 우리나라
개고기를 먹는 식문화에 대한 여론이 국제적으로 이슈화되었다.
모 방송의 손석희 아나운서와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도 바르도와 개고기를 먹는 문화에 대한 난상토론이
이루어졌을 때 나도 귀를 기울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개고기를 먹는 보신탕 문화가 주제가 아니기에 그 문제는 여기서 단락하겠다.
내 유년의 추억 속에도 내가 사랑했던 애완견이 있었다. 좋아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안 계셨으며,
아버지와 엄마가 연탄배달을 나가시면 학교 다녀온 내가 심심하고 적적할까 봐 강아지를
사준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애완견의 종류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똥개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우리 강아지에게 바둑이라는 이름도 붙여 줬다.
학교에서 배운 바둑이 방울이라는 동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하얀색 털에 가끔 한두 개의 검은 점이
있어 바둑알과 같아 바둑이라 했을까? 하여간 그때 대부분 강아지의 이름 중에 바둑이는 흔한 이름이었다.
바둑이는 나에게 단짝 친구였고 말 잘 듣는 동생이었으며 엄마 없는 시간에 외로움을 달래주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바둑이는 따로 집이 없었다.
물을 데우기 위해 언제나 큰솥이 앉혀있는 아궁이 옆 따듯한 곳이 바둑이의 집이었다.
바둑이는 아궁이의 잔열로 따듯한 그곳에 늘 웅크리고 자는 듯 누워있었다.
지금이야 애완견의 사료가 유기농이니, 내 자식이 먹을 거라 신경 썼느니 하지만 그때의 똥개들은 대부분
먹다 남은 밥을 처리하는 잔반 처리 담당이었다. 그런 바둑이는 나를 쫓아다니면서 아이스크림도 얻어먹고
제사지낸 후 생긴 옥춘사탕도 얻어먹고 어쩌다 따끈한 어묵도 한입 얻어먹었다.
그런 바둑이는 아궁이 옆에 누워있다가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내 발걸음 소리를
알고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이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했다. 바둑이는 내 신발주머니를
물어뜯기도 하고, 냄새나는 실내화를 물고 뛰어가면 나도 따라가며 이리줘 안돼 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놀 때도 엄마 심부름하러 갈 때도 바둑이는 언제나 함께였다.
개마다 종이 다르다는 것을 알리 없는 나는 바둑이가 쑥쑥 자라서 t.v에서 봤던 플란다스의
개처럼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매서운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바둑이도 문지방만 하나 넘으면 되는 방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엄마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때의 모든 개들은 방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을 때다. 할 수 없이 바둑이는 아궁이 옆 따듯한
곳에서 버려질 몇 가지 옷을 요 삼아 잠을 잤다.
그런 바둑이가 어느 날부터 눈에는 눈꺼풀이 끼고 기운도 없어 보였고 가끔씩 끼욱 끼욱하며 이상한
소리까지 냈다. 물론 밥도 잘 먹지 않고 장난도 치지 않았다. 그런 바둑이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바둑이를 자주 안고 다니며 많이 쓰다듬어주었다.
지금이야 사람처럼 애완견이 조금만 아파도 동물 병원에 가고 급기야는 수술도 하지만 그때는 사람이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못할 때였다. 물론 동물 병원도 없었을 때다.
어쩌다 10원 20원 돈이 생기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길거리 떡뽁이 집에서 바둑이가 좋아하는
어묵을 사서 먹이기도 했다. 그런 바둑이를 보며 엄마는
“발정이 났는데 짝을 못 찾아서 저렇게 시름시름 하는 거야” 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야 어렴풋이 아 그런 뜻이었구나! 이해 할 수 있는 거다. 아마도 바둑이는
내 사랑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벌써 뛰어나와 나를 반겨야 할 바둑이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마음으로 바둑이를 불렀지만, 바둑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바둑이가 누워있던 아궁이 옆에는 손바닥만 한 검은색 강아지가 한 마리 누워있었다.
저녁에 들어오신 엄마에게 물어보니
바둑이는 마침 동네에 들어온 개 장수에게 팔았고 내가 너무 슬퍼할까 봐 저 검은 개를
대신 샀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바둑이를 너무 예뻐해서 나 없을 때 팔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의 해명에도, 저 작고 예쁜 강아지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인사도 못 하고 그렇게 보낸 바둑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은 것처럼 난 슬피 울었다.
바둑이도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면서 얼마나 낑낑거리고 발버둥 쳤을까?
그때 바둑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슬픈 유년의 기억이다.
태어난 지 얼만 안돼 우리 집에 오게 된 저 까만 강아지가 불쌍해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또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온통 까맣다고 해서 검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검둥이는 얼마 안 돼 내가 학교에 가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집을 나갔다.
아마도 집주변에 나갔다가 길을 있었던 것 인가보다.
검둥이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검둥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난 어린마음에 많이 슬펐고 마음둘곳이 없이 속상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다.
내 10살 인생에 엄마처럼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둑이를 멀리 보내고
세 번째 이별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일인 가구가 늘어나고 혼자사는 사람 대부분은 외로움에 반려견을 키우기도 한단다.
언젠간 나도 일인 가구로 살 때가 오겠지.
그때 쯤이면 나도 바둑이를 기억하며 반려견을 키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