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난 시인이 될거예요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적던 어린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난 시인될 거예요

아빠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셨다.

중·고등학교시절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제법 상을 받을받고 책에 묻혀살 때는

주변에서 나를 문학소녀라 불렀다.

난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고 2학년 때 나는 시집 한 권을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깨알같이 적어놓은 초록빛 작은 노트였다. 모두가 하교한 빈 교실에 혼자남아 시를 읽었고, 외우도록 읊었으며 애절함으로 낭독했다.

그것만으로는 아쉬워 하얀 분필로 노트 속에 있던 시들을 불러내어 초록칠판에서 춤추게 했다.

그리고 나는 교실을 떠났다.

시야 밤새 안녕 ~

다음날 등교했을 때 칠판에 적혀있는 시를 반 친구들이 읽으며 나와 같은 마음으로 감동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도대체 이런 멋진 시를 누가 써놓은 거야 ~ 하는 궁금증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학력고사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밥을 먹듯 시를 먹었다.

시인이 되기 위해 대학의 국문학과를 지원했지만 안타깝게도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원하지 않은 대학을 입학한 후에는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풍선인형 같은 삶을 살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

그러던 어느 날 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늘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나의 사랑은 가슴이 시렸고, 멀리가 났으며, 서글퍼 서러웠다.

내 사랑의 이름은 외사랑이었다.

그런 내 사랑이 곤두박질 칠 때마다 시를 꺼내 읽었다.

이해인님의 시집

그리고 내 마음을 빚댄 시어들을 그에게 적어 보냈다.

가끔은 밤늦은 카페에서 시를 공감하고 논하기도 했던 우리의 날들도 있었지만,

나의 사랑은 7년 만에 끝이 났다.

이제 내 나이 60.

어느 날 책꽂이 저 구석진 곳에 잊힌 듯이 꽂혀있는 빛바랜 시집이 보였다.

그와 헤어진 지 30년.

아틀란티스의 유적처럼 시간의 바닷속에 가라앉은 그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때의 추억들이

한 장 한 장의 시집을 펼칠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진다.

윤동주 시집

그는 지금 먼 이국땅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의 머리에도 희끗희끗 흰서리가 내렸겠지. 눈꼬리가 내려오고 피부도 처졌으며 배도 나왔겠지~

나에게 시를 다시 읽게 한 사람

나를 시의 깊음 속으로 인도한 사람

사랑할 때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했는데 그때 난 슬픔의 심로였다. 그만큼 그를 사랑했다는 것일 게다.

그와 헤어지던 날의 일기에는 조지훈 님의 시를 적었더라.

사랑을 다 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오늘 친구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의 편지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로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무엇이 되고 싶다

시의 한구절을 읽으며 누구에게 절절하게 특별한 의미가 되고 싶었던 그 시절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려온다.

그 시절 난 사랑을 위한 사랑을 했고, 사랑한 만큼 외로웠으며,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서러운 날이 많았다.

이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발버둥치며 30년을 살면서 시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오늘 친구의 편지 속에서 튀어나온 시를 보며

아, 내가 시인이 되고 싶어했었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나에게 꿈이었고, 위로였고, 사랑이었던 시어들.

이제 난 초연해진 마음으로 다시 내 일상에 시를 초대한다.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어딘가에 등단하여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시인인가?

내가 시를 쓰면 난 시인인 거다.

이제 사랑이 추억이 되었고, 외로움이 노래가 되며, 그리움을 삼킬 줄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지난 세월들 속에서 한 음절 한 음절씩 시어를 퍼 올려보자.

이제 나는 내 세계의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