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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디자인 Oct 15. 2021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간다는 것

의도치 않게 주는 상처, 받는 상처에 대해서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이다. 따분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일상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극단적인 일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평온하고 순조로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느긋한 노년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것을 기대하며, 우리의 보금자리를 안락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도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 결혼한 것 같다. 평범하고 수수한 부부. 우리는 그렇게 살다가 늙어 죽을 것이라 여겼다. 아내가 사모예드가 되기 전까지 말이다. 정말 놀랬었지.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아내가 개가 되었다는 것이 그다지 별다를 일이 없었다. 원래 그런 성격들이라, 우리는 다시 평범해졌다. 서로의 특별함은 서로만 아는 걸로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내 일터에서 일을 한다. 한두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있지만, 이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하고 슬쩍 밀어 두고 퇴근을 기다렸다. 퇴근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요즘 날씨가 좋아져서 산책을 재개했으니, 아내가 신나도록 맘껏 산책을 즐겨야지. 아, 오늘 저녁에는 늘 가던 공원 말고 다른 공원에 들르는 게 좋겠다,라고 마음먹던 찰나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어, 엄마.


"그래, 나다. 잘 있었니? 새아가는 잘 있고?"


늘 그렇지 뭐. 근데,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응, 뭐.. 별건 아니고.."


아유, 빨리 말씀하세요오. 그렇게 뜸 들이다가 밥 타겠어요.


"뭐라니, 아니 저... 너랑 새아가 말이다..."


응.


".... 혹시 아기 계획 같은 건 없니?"


으응?! 뭐야... 아직 없는데? 뭐야, 그것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하핫, 우리는... 음... 아직 계획은 없는데?


"아니.... 오늘 엄마가 친구들을 만났는데 말이야, 걔네들은 손자 손녀들이 다 있더라고. 사진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역시 아가들은 다 예뻐. 너네도 결혼하면 금방 애를 낳는다며 별 노력을 다했잖니. 엄마도 내심 너네 닮은 아가가 나오길 바랬거든. 말은 안 했지만 너네 아빠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걸?"


어휴, 엄마는 차암. 우리, 노력하면 금방 될 거야. 너무 급하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신쥐이? 우리도 다 생각이 있거든요~


"애도 참... 알았다, 알았어. 엄마가 또 눈치 없이 말했나? 호호호... 그래도 엄마가 너랑 새아가 만 보고 사는 거 알지?"


네네, 알죠~ 아 엄마, 나 회의 들어가야 한다.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께요옹!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지만 씁쓸했다. 간단한 전화였지만 간단하지 않은 전화였다. 엄마는, 아니, 부모님은 그새 잊으신 모양이었다. 우리가 겪었던 그 힘겨운 나날들을 말이다. 

그날들은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극단적인 날들이었다. 그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날들이었다. 그날들은 모든 것이 잿빛이었고, 마치 산소가 없는 것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날들  속에서 아내는 계속 울고 있었다. 나의 안쓰러운 아내가 그렇게 울고 있었다. 아내는 몸을 있는 데로 구겨, 마치 본인이 세상에 없는 존재처럼 만들려는 듯 작게 웅크리며 울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켜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무기력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 추상적인 존재는 마치 납덩이같이 무겁기만 했다.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 시간이 된다면, 시작조차 안 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달라지지 않은 날들을 버텨야 했다. 그렇게 힘겨운 날들을 겨우 밀어 넣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 오늘 다시 엄마는 나를 다시 물아래로 떠밀었다. 아아, 악의 없는 잔인함은 흔적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휴 참, 우리가 아이를 낳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데. 엄마는 왜 친구분들은 만나셔갖곤. 그래도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내가 그저 외동이라서 그런 거겠지. 어른들은 가족이 많으면 다복하다고 여기시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는 아기들을 무척 좋아하신다. 그 아기들이 자라서 중2병도 걸리고 사춘기도 오고 그러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원. 뭐, 나도 아이가 있길 바라긴 하니까,라고 생각하며 괜히 앞에 있는 종이컵을 꾸겼다. 마음을 안정시키려 한숨을 쉰다. 오늘 전화는 아내한텐 말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어서 퇴근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눈이 퀭해지도록 산책을 하면 힘들어서 오늘 일도 잊겠지. 아내의 털을 만지면 또 금방 잠이 오겠지. 그러면 다 된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따라 퇴근까지 시간이 참 길었다... 엄마한테 전화가 안 왔어도 이리 길게 느껴졌을까? 모르겠다. 뇌가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다. 짧은 사이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 탓이겠지. 그래도 나에게는 아내가 있다. 부드러운 털이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저 사모예드가 내 아내다. 아내가 저녁을 차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삼, 아내가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라며 흡족한 기분이 든다. 다들 이런저런 고충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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