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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디자인 Oct 15. 2021

사람 간에 길들여진다는 것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나 때문에 어그러진 주말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아 남편과 나는 다시 예전처럼 쾌활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부부란 원래 그런 거지 싶다. 결혼하기 전에는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고루하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그만큼 부부 사이를 표현하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싸워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친해지는 사이. 남동생보다, 부모님보다 서로를 더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관계. 그래서 우리는 늘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한다. 늘 고마운 남편이다. 이런 마음으로 늘 남편을 대해야 하는데, 왜 자꾸 나는 이빨을 드러내는 걸까.



남편이 출근하느라 어수선했던 시간이 지나고, 어제와 같이 조용한 오후가 느긋하게 흘러간다. 한동안 촉박하게 일했던 로고 관련 작업이 끝났기에 오늘은 마음껏 널브러져 있어도 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메일이나 프로젝트 관련 사이트는 체크해 둔다. 회사 다닐 때도 그랬지만, 매일의 루틴을 지키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격이다. 그래서 회사원으로 잘 지낼 수 있었을 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려니 조금 덥다. 역시... 털 때문이다. 에어컨을 켰다. 경쾌한 전자음 소리와 함께 에어컨 바람이 들어오자, 그때야 살만해졌다.



예전엔 더위보다 추위를 탔던 사람이었는데. 여름에도 웬만하면 에어컨이 없어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에어컨을 틀어놓지 않으면 더워서 난리가 난다. 더워서, 개처럼 헥헥거리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서글프다. 테이블에 앉아 메일 체크를 하다가, 결국 더위에 항복하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로봇 청소기가 아직 행동을 개시할 정도는 아니라서 바닥에 털이  날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피서가 없다. 시원한 바닥에서 어느 정도 누워있었을까. 진동울렸다. 엄마다.



여보세요.


"나다. 엄마. 잘 있었니?"


응 별일 없어. 근데... 왜?


"뭐, 왜긴 왜야. 그냥 딸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저기, 이 서방은 잘 있고?"


잘 있어. 아 참, 엄마. 쿠팡으로 물 정기 배송은 잘 되고 있어요?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서 잘 못 챙겼네. 영양제는 잘 챙겨 먹고?


"물은 잘 오고 있어. 늘 고마워~ 역시 딸이 이런 건 잘 챙긴다니까? 영양제는 떨어지면 얘기 하마."


그럼 다행이고. 별일 없으면 나중에 또 통화해요.


"기집애.... 그렇게 전화가 하기 싫으니? 알았다, 알았어. 엄마가 나중에 또 전화할게."


네, 들어가세요.



일주일에 한두 번,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거신다. 퇴직하신 후 조금은 적적해서 그러신 지, 전화로 딸에게 안부를 묻는 일이 하나의 낙이 된 듯싶었다. 이렇게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그나마 많아진 편이다. 독립해서 자취하고 있을 땐 이것보다 통화량이 더 적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우리 가족의 연락 방식에 무척 잘 어울린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가족은 명절이나 생일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남동생이나 나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연락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카톡의 상태 메시지나 프로필 사진을 통해 서로의 상황을 어렴풋이 확인하면서 지내는 것이 전부다. 만나면 그래도 잘 지내는데, 연락을 싫어하는 건 가족 내력인 듯싶다. 그나마 엄마랑은 이렇게 전화라도 하지. 남동생과는 거의 초성으로만 대화한다. 참 정 없는 가족이다.



학창 시절 때 친구들 중에서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는 거의 없다. 나는 필요한 상황이 끝나고 나면 상대방에게 연락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진 친구들이 꽤 된다. 그나마 지금까지 간간이 연락하는 친구들이 대학교 때 친구 한두 명, 회사 생활을 하면서 친해졌던 그룹 무리 중에서 한 명? 정도랄까. 그와 반대로 남편은 직장 동료는 물론이고 대학교 때 친구들과도 연락을 자주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가끔은 중학교 때 친구까지 만날 때도 있다.



'무뚝뚝하고 사교성 없다'라는 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에게 해 온 평가다. 가끔, '서슴없이 차가운 말을 내뱉는 독설가'라는 소리도 들었다. 필요 없는 것은 사지 않고, 늘 절약하는 생활 습관이 말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요한 말만 하고,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래도 친분을 유지할 사람들은 여전히 내 주위에 남는다. 지금까지 나와 연락을 하는 친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연락을 자주 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다 그런 거지 뭐.



친구를 사귀는 것뿐만 아니라 연애 과정에서도 연락을 잘하지 않는 것은 늘 문제가 되었다. 남편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은 나의 이런 연락 방식을 의아해했다. 다른 여자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면서 연락하는데, 넌 맨날 내가 먼저 해야만 되냐? 사귈 때마다 남자 친구들이 나에게 하던 말이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으니 연애 기간이 길지도 않고, 늘 싸워서 지치기만 했다. 어차피 입에 발린 미사여구 같은 건 예전에도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테니, 그리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니... 이렇게 짝도 못 만나고 혼자 살다 죽겠지 뭐,라고 생각하며 자의적 독신 주의자로 살아가겠노라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남편과 소개팅을 했을 때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첫 만남 이후로 남편에게 수시로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뭔가 모르게 이 사람과 있으면 계속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화젯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이런 게 바로 운명인 건가. 어느 날, 남편과의 전화 통화가 30분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다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시댁에 들어섰을 때, 왜 남편에게 끌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시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집안 곳곳에 따스한 분위기가 흘렀다. 부족함 없이 커서 바르게 사회에 적응한 모범 시민이 다시 아이를 낳고 길러서 성인을 만들어놓으면 이런 느낌일까? 시부모님은 아들이 선택한 여성에게도 아낌없이 사랑을 주신다. 생일이나 명절이 아닌 때에도 연락이 오고 가고, 가끔은 따뜻한 식사를 하기도 한다. 이런 가정의 따뜻함은 텔레비전 속 드라마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인지 남편과 시댁에 가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부드럽게 대화를 할 수 있다. 아직 이 따스함에 적응하긴 좀 이르지만, 그 따스함이 좋다.

그래서 남편은 아직도 내가 나긋나긋한 사람인 줄로만 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무척 무뚝뚝해,라고 말하면 빙그레 웃으며 거짓말이지?라고 웃는 남편. 아마도 남편의 그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와 퍽 잘 맞는 것 같다. 남편만 있으면 저절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버려진 박스에 남겨진 고양이를 주워와서 키우듯, 남편이 나를 키우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따뜻한 남편의 모습에 나는 점점 길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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