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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디자인 Oct 15. 2021

삶에 새로운 것을 들인다는 것

아내는 늘 무언가를 참고 있다



산책을 무척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겨울과 봄 내내 즐겁게 (아니... 나에게는 괴롭게) 산책을 즐겼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우리는 그 즐거움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장마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얏호!)



환경오염이 심해져 기후 변화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왔다. 교육받을 땐 계절이 뚜렷했기에, 우리가 배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먼 이야기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고 나니 그 교과서에 있는 내용들이 실제 상황이 되었다. 세상에나. 여름이 길어진 것뿐만 아니라 장마 또한 길어진 듯싶었다. 아니다, 그냥 동남아에 온 것처럼 소나기가 수시로 내렸다가 햇빛이 쨍하고 난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비는 다행히도, 그냥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매일 우산이나 우비를 챙겨야 하는 것,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는 점 외에 우리의 일상이 크게 바뀔 일은 없었다. 다만 아내가 사모예드가 되었으니 산책이 어렵게 되었다는 아아주 큰 문제가 생겼을 뿐. 뭐가 마려운 듯 낑낑거리며 비 오는 하늘을 초조하게 보는 아내의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아차, 그렇다고 그냥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날이 개면 산책은 재개되어야만 하니까. 기상예보를 보고 비가 그친다는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산책을 나선다. 그러나 얼마 안가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우렁찬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 비에 쫄딱 젖어 집으로 귀가할 때 아내의 꼬리는 축 처져 있었다.



젖어도 샤워하면 그만이지 뭐,라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아내는 비 맞는 걸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첫 번째 이유로는 털이 젖어서 몸이 무겁고, 두 번째 이유로는 젖은 개 털 냄새를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괜찮아, 우리 둘뿐인데 냄새 정도는 참을 수 있어,라고 했지만 아내의 얼굴은 집 안에서 털이 눈처럼 날릴 때와 마찬가지로 망연자실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렇게 몇 번, 예고도 없이 내리는 비에 호되게 당한 우리들은 결국 산책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는 더더욱 침울해했고, 그런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개 장난감을 사다 줬는데 또 등짝을 맞았다... 이번엔 참을 수 없다는 듯, 엉엉 우는 아내를 보며 한동안은 장난을 그만 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안 그러면 진짜 아내가 미쳐 날뛸 수도 있으니까. 아니, 물릴지도 모른다. 저거, 저거 봐, 또 으르렁거리는 것 봐. 눈을 마주치면 안 되겠다. 아니, 그냥 숨도 쉬지 말아야겠다.



며칠 동안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주말을 맞이하여 그쳤다! 비에 말끔해진 공기가 상쾌했다. 이런 날씨라면 피크닉을 가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오랜만에 못했던 핫플에 가서 쇼핑을 하러 갈까? 상상만 해도 막 마음이 설레는데, 때마침 인스타그램을 켜니 우리 동네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광고가 떡하니 있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광고 포스터에는 우리가 원하는 정보들이 있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자그마한 공원에서 진행되는 아티스트들의 플리마켓. 꽤 재미날 것 같았다. 어쩜, 간절히 원하는 이에게 길이 열린다고 하더니 길이 여깄구나? 싶어서 아내에게 플리마켓 광고를 보여주었다. 산책을 못해서 시들시들하게 죽어가던 아내의 눈이 반짝, 빛이 난다. 성공이다!



야무지게 준비를 하고 찾은 공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개성 넘치는 굿즈들, 싱그러운 꽃과 화분들,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 등을 파는 셀러들 사이로 우리처럼 부부 (또는 커플) 데이트를 즐기려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사이로 유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며, 개들을 데려온 사람들이며, 개들이며... 아무튼 번잡했다. 이미 손쓸새 없이 개들과 아내는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동안 산책도 못하고 동네 개들을 만나지 못했던 아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다행이야, 란 마음을 뒤로한 채 오랜만에 나도 쇼핑을 즐기기로 했다.



뭐든 기능적인 면만 따지는 아내와 달리 나는 꽤나 디자인이 예쁜 물건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내가 '가성비'를 찾는다고 하면, 나는 '가심비'를 찾는다고나 할까. 디자이너인데도 불구하고 아내는 본인의 삶에 디자인이 들어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개발자인 내가 오히려 디자이너처럼 보일 정도로 아내는 수수한 삶을 지향했다. 수수해도 예뻐서, 수수함을 추구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결혼한 거긴 하지만. 흠흠.



아내를 사랑하지만, 내 성향대로 쇼핑을 즐기는 것도 무척 사랑한다. 그래서 한참 동안이나 플리마켓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질렀다. 나중에 아내에게 용서를 빌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사기 시작했는데, 이를 어쩌나, 벌써 손에 한가득이다. 빙수 만들어 먹을 때 올려두면 예쁠 것 같아 산 벚꽃잎 모양의 작은 티스푼, 작은 화분을 넣으면 예쁠 것 같은 라탄 가방 (사서 쇼핑 바구니로 사용하고 있었다), 홈 카페에 어울릴만한 빈티지한 작은 접시들, 식탁으로 쓰는 테이블에 덮으면 좋을 것 같은 레이스 보까지 샀는데, 아내가 왔다. 아아, 들켰구나, 싶었는데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 그럼 내친김에 하나 더 살까, 싶어서 눈여겨보던 작은 선인장을 보여줬다.



여보 이거 어때? 우리의 인테리어에 딱인 식물인데.


".... 여보, 이미 뭔가 손에 많이 들려 있는데?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여보 옆에 없었던 건가?"


아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우리 요새 인테리어에 통 신경을 못 썼잖아. 그래서 우리 집의 디자인 담당인 내가 쇼핑 좀 했어. 마지막으로 식물까지 사면 요새 유행하는 플렌테리어를 완벽하게 완성할 수 있어~ 어때? 너무 예쁘지?(... 여기까지만 했었어야 했다.)



이렇게 한참 사고 싶은 선인장을 '홍보'하고 있는데, 아내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진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지금까지 쇼핑한 것도 좋지만, 마무리는 저 선인장인데. 선인장이면 기르기도 쉽고 관리도 편하니까 아내도 그렇게 반대는 안 할 것 같다. 밀어붙이자.



이것 봐, 이 선인장은 만세 선인장이라고, 이렇게 손을 올린 것처럼 귀엽게 자란다? 어때? 귀엽지?


.....


이 정도면 여보가 자주 물을 안 줘도 되고, 인형처럼 귀여워서 기분 전환에도 좋을 거야. 살까? 가격도 저렴해애~


".... 그만하자."


선인장이 갖고 싶어서, 선인장만 보면서 이야기를 했던 탓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아내는 겨우 무언가를 참고 있었다. 오랜만의 쇼핑이라 신이 났던 나는 아내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무심함에, 아내의 마음은 소리 없이 다치고 있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서둘러 아내를 토닥이며 집으로 왔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라는 말이 계속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아내는 듣지 않았다. 그저 슬픈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높이 솟았던 꼬리가 어느새 축 처져 있었다. 오랜만의 날씨 좋은 주말은 비가 오는 주말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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