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흥디자인 Oct 15. 2021

생명을 키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난 언제나 자신이 없었어



사모예드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부분은 역시나 '산책'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즐겼던 산책의 시간은 여름이 시작됨과 동시에 멈추게 되었다. 아아, 그 지겨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전엔 장마라는 시기가 있었고, 비가 오는 정도도 봐줄만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 덕분에 산책은 점점 하기 어려운 일로 변해갔다. 기상청 예보에 맞춰서 나간다 한들, 여봐란 듯이 비가 내려 우리의 몸을 적셨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비에 우산이나 우비는 소용이 없었다.



비를 맞으면 가장 안 좋은 점은 '털이 젖는다'라는 것이었다. 사모예드가 되기 전에도 머리가 젖으면 언짢았는데, 이제는 온몸에 있는 모든 털이 젖으니 더 안 좋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냄새도 난다. 집에서 눈발처럼 털이 날릴 때도 아찔했는데, 비에 젖은 개 털 냄새는 상상 초월이었다. 정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집까지 가는 내내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 개란 존재는 이렇게 성가신 게 많은 존재였구나. 새삼 머리털만 있는 인간의 존재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근데 나도 원해서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억울하네.



털이 젖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남편이다. 같이 사는데, 털 때문에 기침도 많이 하고 눈물도 흘렸는데. 이제는 냄새까지 풍기다니. 울적한 마음에 꼬리가 처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남편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괜찮다고 하지만, 얼굴을 돌리며 슬며시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면 냄새가 나는 게 맞는 거 같다. 아, 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비를 맞고 온 날이면 목욕을 꼼꼼히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욕 시간이 두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을 때도 있었다. 산책을 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 씻느라 더 힘이 들었다. 결국 여름 동안에는 산책을 안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한동안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며 내가 왜 이리도 산책에 목을 매는가, 고민도 했다. 사람일 때는 걷는 것이 싫어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탔었는데. 지금은 하루라도 산책을 안 하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비가 오면 산책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그저 낑낑대며 창밖만을 바라볼 뿐이다.



한창 비가 정신없이 내리던 시기가 지나고, 드디어 화창한 날이 왔다. 게다가 주말이다! 침대에 누워 남편과 무엇을 할까 느긋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의기양양한 얼굴로 남편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뭐지, 싶었던 내 눈에 우리 동네 공원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 가까운 거리에, 바로 오늘 열리는 플리마켓이라니! 집을 떠나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활짝 웃으며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의 맑은 날씨라 공원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플리마켓을 기획한 사람이 기막히게 날을 잘 맞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사한 날씨에 어울리는 상쾌한 분위기의 플리마켓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산책 말고 쇼핑을 나선 남편은 신난다는 듯, 즐겁게 웃었다. 완벽한 주말이다. 이런 날이 정말 오랜만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나 또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기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내 주변에 동네 개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개 훈련사인가 봐...라며 놀라워할 정도로 개들이 모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한참을 개들과 교감을 나누고 나서 남편을 찾으니 이거 웬걸, 남편 손에 하나 가득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동안 나만 돌보느라 남편은 사람들과 약속도, 저녁에 그렇게 즐기던 맥주도 즐기지 못했다. 산책에 지쳐 온라인 쇼핑마저 하지 못했던 남편이었다. 원래 예쁜 소품들을 좋아하는 데다가 워낙 사는 것을 즐기는 맥시멀 리스트였는데 말이지. 그동안 잘 참았다 싶었다. 그래, 오늘은 날도 좋으니까 남편이 사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나, 남동생 이렇게 모범적인 4인 가족이었던 우리 집은 그렇게 부자도,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이었다. 아니다, 딱히 여가활동을 하거나 사치스러운 쇼핑을 즐기지 않았으니 평범보다는 조금 가난했을지도 모르겠다. 늘 집에서는 절약하는 습관이 따라다녔다. 수도꼭지에 물이 흐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전자 기기는 쓰지 않으면 꼭 끄고 콘센트를 빼놓았다. 엄마는 학교에서 필요하다는 준비물은 무엇이든 간에 사주었지만, 그 외에 물건은 절대로 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도가 텄다. 사고 싶으면, 내가 벌어서 사야만 했으니까. 집에서 물건을 사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꼭 사야 한다면, 오래 쓸 수 있을 튼튼한 제품만을 골랐다. '가성비'라는 유행어가 나오기 전부터 우리집은 이미 가성비를 따지고 있었다. 



이런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 아래, 나는 나도 모르게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옷을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쇼핑을 잘 하지 않는다. 옷을 사야 한다면, 그마저도 튀지 않도록 무채색으로만 고른다. 자취할 때는 가구가 많이 없었다. 꼭 필요한 것들로만 공간을 채웠기에 늘 나의 방은 쾌적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의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수도승'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쇼핑을 다른 여자들처럼 즐기게 된 건,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부터였다. 어쩌면 연애시절에 남편이 장난스럽게 사다 준 선물들 모두, 그렇게 경직되어 살지 않아도 된다는 따뜻한 위로였을까... 지금 들어서 드는 생각이다.


신나게 물건을 고르고 사던 남편이 드디어 나를 보았다. 나를 보며 앗차-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장난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저 봐. 또 용서를 구하겠군. 뭐, 오늘은 날이니까,라고 생각하며 그냥 웃었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남편은 하나 더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며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뭔가 했더니만, 마치 어린아이가 만세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선인장이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귀여운 모습 때문에 골랐겠지 싶었다. 그래, 이것까지 사라고 할까, 싶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다. 저걸 사면 내가 키워야 하잖아. 내가 과연 키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선인장을 지켜내고 싶었다. 



이 플리마켓의 가장 큰 장점은 날이 맑은 날에 열렸다는 점도, 개성있는 아티스트들이 참가했다는 점도 아니었다. 바로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서 열렸다는 것이다.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전에 집에 서둘러 갈 수 있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남편은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했지만, 이건 남편이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이 즐거운 주말 데이트를 망친 건 나니까,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런데 이런 말을 남편에게 꺼내지 못하고 결국 꾹꾹 눌러 담기만 했다. 그런데도 착한 남편은 늘 나에게 한없이 다정하기만 하다. 이런 남편의 따뜻함에 계속 기댈 수 있을까.



이전 05화 삶에 새로운 것을 들인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