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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디자인 Oct 14. 2021

개가 된 것을 들킨 후의 일상

우리는 계속 같이 살 수 있을까?



내가 사모예드가 되고 나서 우리의 일상은 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모예드가 된 것을 들킨 후의 일상이 변했다. 남편은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내가 조목조목 몇 개월 동안의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나름 납득한 듯하다. 그래도 가끔 아침나절에, 또는 저녁때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변한 내 모습이 익숙지 않은지 흠칫거릴 때가 있다. 그 모습에 나도 조금은 상처를 받았지만, 악의가 있는 행동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작은 선물이라며 곱게 포장해서 주는 것들을 보면 화가 치밀 때가 있다. 개가 된 것도 황당해 죽겠는데, 개 껌이라니. 개 장난감이라니.... 이가 좋지 못해 잘 씹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개가 된 것을 놀리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머리가 복잡해진다. 결국 울컥 화가 나서 등짝을 때리게 되지만. 이렇게 엉뚱하고 황당한 선물을 마주하게 되면 금세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래도 평정을 되찾고 꾹꾹 눌러 담는다.



남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사귈 때부터 그랬다. 뜬금없이 내가 생각나서 사 왔다는 물건들이 다 나를 놀리기 위한 것들이었다. 서너 살이나 좋아할 만한 사탕 반지라던가, 무채색을 좋아하는 내가 질색할만한 알록달록한 원피스라든지 말이다. 처음엔 웃으면서 받아들였지만, 그 후로 몇 번 더 그런 선물을 받으니 엄청 화가 났다. 그래서 펑펑 운 적도 있다. (하마터면 헤어질뻔했는데. 남편은 전혀 모른다.) 그런데도 남편이라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든 간에 그 모습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지만... 울컥하는 성격 때문에 남편은 등짝이 남아나질 않는다. 맞으면서도 남편은 히죽히죽 웃는다. 어휴, 오늘도 내가 참아야지 뭐, 하며 남편이 사 온 반려견 용품을 고이 보관한다. 언젠가는 진짜 개를 키울 수도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머리숱이 많은 나는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잘 빠지는 편이었다. 이렇게 빠졌으면 머리카락이 좀 줄어야 할 텐데, 하나가 빠지면 그 자리에 두세 개쯤 자라는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머리카락이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사람들은 있는 자의 투정이라며 그저 부럽다고만 했다. 부럽긴요, 다 상황에 처해봐야 알죠,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보고 참 차갑다고 했다. 사실이 그렇고 다 맞는 말인데 왜 나보고 차갑다고 하지, 지금도 모르겠다. 내 성격이 엉뚱해진 건 어쩌면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서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람들은 늘 나보고 독특하다고만 했다. 그래서 그냥 독특하고 엉뚱하기로 했다.



그랬던 내가 사모예드가 되니 털이 엄청 빠졌다. 와, 정말... 너무 많이 빠진다. 지금까지 빠졌던 머리털과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알고 보니 사모예드는 그런 개였다. 씻겨도 털이 날리고 그냥 있어도 털이 날리는 개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검색하며 개를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장모종은 대부분 털 때문에 전쟁이라고 했다. 아, 어쩌지. 생각보다 개가 되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털이 날리는 것을 외면하기엔 그 상태가 심각했다. 흰색 털이 빠지는 모습이 마치 눈발이 날리는 듯했다. 하늘하늘 날린다. 바람이 불면 그 털이 뭉쳐서 군락을 이룬다. 매일매일이 겨울 같다. 남편은 괜찮다고 말을 하지만, 자꾸 재채기를 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치가 보였다. 다정다감한 남편이니까 참는 거겠지 싶다. 그래서 털이 날릴 때마다 바닥을 쓸고 닦았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해도 그때만 좋아질 뿐, 돌아서면 또 털이 있다... 개라서 땀이 나지 않지만, 그럴 때마다 정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좋지, 어쩌자고 나는 개가 된 거지 싶어서 우울해졌다. 남편에게 개라는 것을 들키기 전까지 털이 이렇게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들키고 나서는 털이 더 많이 날리는 것 같다. 하루 종일 털과 싸웠는데 늘 나는 지고 만다. 꼬리가 축 처진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남편이 말렸지만, 그건 너의 생각이고, 나는 민망해 죽을 것 같아!라고 외치며 털을 치웠다. 땀이 나지 않지만 정말 땀나게 치웠다. 그렇게 열심히 치우다가 한계가 왔다. 어느 순간 더 이상은 못하겠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그동안의 노력과 서러움이 눈물로 비어져 나온듯했다. 정말 엉엉 울었다. 도저히 못하겠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라며 엉엉 우는데... 남편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더 서운했다. 남편은 정말 내 마음을 모르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삐져있었는데, 그건 내 오해였다. 다음날 남편은 퇴근길에 로봇 청소기와 공기청정기를 한 아름 사들고 왔다. 이 기계들이 여보의 근심을 없애줄 거야,라며 남편은 배시시 웃었다. 남편의 말대로 두 기계는 내가 털이 날릴 때마다 곧바로 작동했다. 털이 날리던 집이 이제는 멀끔하다. 남편이 엉뚱한 선물만 사는 걸 좋아하는지 알았는데, 의외로 적절한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맙다는 말이 쑥스러워 진작에 이렇게 하지 그랬어,라며 툴툴댔는데 남편은 투정도 좋은지 그냥 웃는다. 남편은 바보다, 바보.



속 좋은 남편은 산책을 가자고 말하면 그대로 따라준다. 개라면 응당 산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싶다. 덕분에 나는 맘 놓고 산책을 할 수 있다. 내가 개라는 것을 들키고 난 후에 일어난 일중에서 가장 만족스럽다. 예전엔 산책을 나가고 싶어도 왠지 눈치가 보였는데, 지금은 당당하다. 그리고 산책은 역시 두 시간 정도 해줘야 맛이다. 길의 풍경도 보고, 냄새도 맡고. 사람도 구경하고. 그러다가 주변을 산책하는 다른 개와도 만나서 서로 교류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말이다. 



물론, 다른 개와 너무 오래 냄새를 맡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남편이 싫어하는 것 같다. 지금도 남편이 노려보는지 뒤통수가 무척 따갑다... 그만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나 보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면 남편에 대한 불만이 싹 사라진다. 개가 되어서 무척 다행이다 싶다. 사람이었을 때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어도 해결할 방법이 많지 않았는데, 이제 산책만 하면 된다. 산책을 마치고 나서 남편의 얼굴이 피곤해 보이지만, 나는 개님이고 남편은 개를 산책시킬 의무가 있다. 그러니 산책 시간이 길다는 불만은 무시할 것이다. 흥.



그래도 산책 후에 털을 만지는 시간이 있어서 남편도 그럭저럭 사모예드가 된 것에 만족한 듯하다. 털이 좀 날리지만, 난 참 반지르르한 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큼은 남편이나 나나 동의하는 부분이다. 털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내가 쓰다듬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이 털을 쓰다듬어주면 충만한 만족감이 든다. 남편도 부드러운 털을 만질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이렇게 한동안 털을 만끽한 후에는 잘 시간이 된다. 추위를 타는 남편을 위해 침대를 데워놓으면 남편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잠에 든다. 개가 된 것에 별 느낌이 없이 살았던 시간과 털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던 시간이 지나니 이렇게 좋은 날이 오는구나. 내 생애에서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하지만 늘 언제나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꼭 이렇게 행복함을 느낄 때 꼭 불행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조마조마하다. 행복해도, 행복하지 않다. 남편이 마음을 바꿔서 날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그런 날이 오면 난 어쩌지란 마음 때문에 마음이 조인다. 과연, 우리는 계속 같이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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