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는 계속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아내와 사모예드가 되고 나서 우리의 일상은 변한 것이 없다. 아니, 그냥 전과 똑같다! 너무 평범해서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나와 아내의 눈에만 아내가 개로 보일 뿐이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냥 사람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개가 되고 몇 개월 동안 마트도 다녀오고 택배 기사도 만났는데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고, 모두 자신을 사람처럼 대했다고 한다. 그래? 조금은 미심쩍지만 아내가 그렇다니 나도 아내 말을 믿기로 했다. 어쩌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아내가 너무 차분하니 혼자 난리를 피우는 것도 웃기니까. 그래서 그냥 아내가 개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아내가 개가 되었으니.... 그동안 사보고 싶었던 반려견 용품을 사서 작은 선물이라며 슬쩍 들이민다. 개 껌이라든지, 아니면 개 장난감이라든지 말이다. 흐흐흐. 그럴 때마다 내 등짝은 남아나진 않지만. 아내의 그 미묘한 - 발그레해진 얼굴로 화가 났는데 화를 낼까 말까 하는 - 표정을 보는 게 소소한 재미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그래도 멀쩡한 사람이 개가 되었는데, 100% 같은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어렵다. 일단, 매일 산책한 것부터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로 변한 것을 몰랐을 때에는 소심하게 산책을 하자고 말했던 아내가, 이제는 부담이 없어졌는지 어느 때나 산책을 가자고 조른다. 퇴근하고 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돌아온 날은 물론이고, 불금이라고 술을 거하게 마셔서 늦잠을 자고 싶은 주말 아침에도 상관없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산책을 시작하면 기본은 두 시간이다. 두 시간. 후... 힘이 들어서 아내의 얼굴을 보면 아주 뻔뻔하다. 왜? 힘들어? 난 별로 안 힘드니까 어여 걸어, 이런 식이다. 나님이 개님이니까 어서 날 산책시켜야 한단다. 아아, 정녕 저 개가, 저 아내가, 나를 말려 죽이려나 보다, 싶다. 눈이 퀭해져서 걷고 있는데 아내는 그걸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저리 신나서 꼬리를 흔들고 주변 개를 만나고 아아주 신이 났다. 아니, 웃어? 아아니, 냄새를 맡아아?! 저게 바람의 시작인 건가, 응? 정녕 아내는 저 개랑 바람을 피우는 건가? 아니.... 내가 개한테 질투한다고? 에휴, 그만두자. 아주 아내가 얄미워 죽겠다.
산책 시간이 늘어서 피곤해 죽겠는데 덕분에 살은 엄청 빠졌다. 산책이 너무 힘들어 주변 친구들과의 술 약속은 엄두도 못 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산책은 해야 하니까. 사람들은 이런 속도 모르고 다이어트 중이냐고, 참 독하게 살 뺀다고 놀리기까지 했다. 이보세요들, 저는 다이어트와는 담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냥 저녁에 퍼져서 살얼음핀 잔에 맥주를 꼴꼴꼴 부어 촤악-들이키는 게 제 낙이었다고요, 제발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봐도 이건 속성 다이어트 코스라서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적어도 우리 개, 아니, 우리 아내는 다른 개처럼 똥오줌을 길가에 아무렇게나 지르진 않으니 다행인 건가 싶다. 이런 말을 아내에게 했다가 혼나긴 했지만. 외모가 개여도 여전히 속은 사람인지라 사람의 규칙을 지키려는 아내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기도 하다.
산책에 이어 놀라운 점은 아내의 털이 정말 잘 빠진다는 점이다. 개인 줄 모를 때에도 개 털이 날리길래 이 털이 어디서 오나 싶었는데, 범인은... 그렇다, 아내였다. 놀라운 털 빠짐에 기가 차서 검색해보니, 사모예드가 원래 그런 개였다.... 씻겨도 털이 빠지고 그냥 있어도 털이 빠지고 그냥 털뿜뿜하는 개였다. 비염이 없는데 자꾸 재채기가 난다. 눈물이 자꾸 난다. 그 모습에 아내는 미안하다며, 열심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걸레로 열심히 바닥을 훑는다. 찬장과 책장에, 그리고 소파에 앉은 털을 열심히 털어낸다. 반려견을 키운다면 필수로 가지고 있는 돌돌이며, 빗이며 구비해서 털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청소를 한자리에 또 털이 날리니, 하나 마나 한 청소였다. 어찌 보면 웃긴 모습이다. 털이 날린다 → 청소를 한다 → 청소한 자리에 또 털이 날린다 → 그냥 털이 계속 남아있다. 뭘 해도 도로아미타불이다. 보통 개들은 자신의 털을 인지 못하고 뒹굴던데, 우리 아내는 자기 털이 빠진다는 사실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대로 둬, 괜찮다는 말을 해도 아내는 불편한지 안절부절못했다. 생각해 보면 아내는 개가 되기 전에도 머리털이 자주 빠지는 편이었다. 머리숱이 그리 많으니 잘 빠지나 보다,라고 받아들였더랬다. 그렇지만 이 말까지 하면 아내가 더 상처 받을까 싶어 말하진 못했다.
아무리 치워도 털이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설움에 받쳤는지, 결국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울면 정말 서럽게 운다. 달래줘도 잘 듣지도 않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아내라는 존재는 눈물이 많은 존재라 여겨 그냥 두려고 했지만 털을 뿜으며 우는 아내의 모습이 왠지 웃퍼서 공기청정기와 로봇 청소기를 들였다.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놀리면 크게 혼날 것 같아서 질렀는데, 그나마 그 두 가전 기기가 들어온 이후부터 집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털이 날릴 조짐이 있으면 이 두 기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빨아들인다. 새삼 첨단 기술의 발전을 느꼈다. 들일 때는 돈이 좀 들어서 고민스러웠지만, 아내가 울지 않으니 됐다. 누군가 그랬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그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고. 나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돈을 썼다. 칭찬해 나 자신. 참 잘했어.
그래도 아내가 개가 되어서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아내의 털은 무척 부드럽다. 그리고 끝없이 만질 수 있다. 그나마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털이라는 놈은 참 애증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흠. 아무튼, 저녁나절 그 힘든 산책을 마치고 어구구구 소리를 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면 아내가 다가오는데, 그때부터는 천국이다. 부드러운 털을 계속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 또한 쓰다듬을 받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산책을 할 땐 미워 죽겠는데, 이럴 땐 둘도 없는 단짝이다. 비록 만질 때마다 털이 빠지지만, 뭐 어떠랴. 우리에겐 이제 공기청정기가! 그리고 로봇 청소기가! 있다. 더 이상 우리에겐 불필요한 털 날림은 없다. 그래서 만족스럽게 쓰다듬는다. 자꾸 만져도 또 만지고 싶은 아내를 쓰다듬다 보면 둘 다 졸음이 온다. 그럼 곧바로 잘 시간이다. 산책과 술 없는 저녁 덕분인가, 우리는 무척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내가 개가, 아니, 사모예드님이 된 덕분이다.
아 참, 아내가 사모예드가 되어서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굉장히 따듯하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난로가 따로 없다. 더위는 잘 안 타도 추위를 타는 나를 위해 잠들기 전 아내는 먼저 침대에 들어가 있다. 아내가 들어간 지 정확히 10분 정도 지나면 침대는 잠들기 딱 좋을 정도로 데워져 있다. 예전엔 이불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을 추위와 싸워야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게 얼마나 좋은지!
그와 반대로 아침에 일어날 때는 곤욕스럽다. 너무나 따뜻해서 이불 밖으로 나서는 게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어려워진다. 코끝이 차가워지는 아침나절, 아아... 이대로 아내와 함께 침대에서 꼬무락거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내의 따뜻함은 정말 마약 같다. 여름이 되면 이 따뜻함이 싫어지려나, 싶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아서 즐기기로 했다.
처음엔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아내가 개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죽을 정도로 곤란한 적은 없었다.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같이 살아가기 좋은 존재라 여기고 있다.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존재인데, 그 모습이 바뀐다 한들 뭐 문제가 있나 싶다. 이런 마음을 아내가 알아주면 좋겠지만. 여전히 엉뚱하고 비관적인 아내는 자신한테 날리는 털과 싸우며 내 눈치만 본다. 안 그래도 돼,라고 말하지만 아내는 듣지 않는다. 참 내,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그래도 그 모습이 사랑스러우니 됐다. 우리는 계속 같이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