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흥디자인 Oct 15. 2021

상처 입고, 상처 받는 것

도대체 우리는 어떤 미래로 향하고 있는 걸까



오늘따라 남편이 이상하다. 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신이 나서 얼굴에 빛이 나는데, 오늘은 아주 잿빛이다. 어둡다. 어깨가 축 처져 온 모습이 안타까웠다. 상사한테 혼난 걸까? 아니면 시댁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말없이 식탁을 차렸다. 그런데... 오늘 반찬은 남편이 그다지 좋아하는 게 없네. 일이 밀려 시간이 없어서 그냥 있던 반찬으로만 차리려고 했는데. 제육볶음이라도 반찬가게에서 사 올걸.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좋아하는 통조림 햄을 꺼내 구웠다. 짜고 짠 햄, 뭐가 좋은진 모르겠지만 남편이 제일 좋아한다. 어릴 때 특식이었다나. 그래도 좋아하는 반찬이 하나라도 있으면 기분이 풀리겠지 싶었다. 다행히,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나서 꽤 기운을 차렸다. 역시, 힘이 없을 땐 짠맛이 최고다.



하지만 산책을 하면서 다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가 문젤까. 혹시... 내가 개라서 이혼하려는 걸까? 근데 지금까지 우리 잘 지냈는데... 아니야, 참고 참다가 결국 못 살겠다 싶었던 걸까. 내가 개니까, 결국 우리가 바라는 아이는 낳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 그건가 보다. 우리가 결혼한 이유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고, 화목한 가정에는 아이가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아이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을 누차 우리에게 강조해왔다. 그래서 결혼을 하기 전에도, 내 머릿속에는 결혼 계획과 아이 계획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 어렵게 되었으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오늘 말하기로 결정했나 보다. 어쩌지. 남편이 아무리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이건 확실하다. 남편은 나랑 이혼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남편이 나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여보 있잖아."


응.


"우리.. 다시 아기 가져 보는 거 생각해 볼까?"


응? 왜...?


"아니... 결혼하고 쭉 아기를 낳고 싶어 했으니까, 그럼 행복해질 거라고 말했잖아. 이제야말로 아기를 낳기 딱 좋은 때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지만... 난 개인데? 개와 사람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자기도 참,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딨어? 설마.. 그래서 생각 안 하는 거야? 그럼 영영 우리 안 갖는 거였어?"


그런 건 아니지만...



역시나 아이 문제를 꺼내는 걸 보니 남편이 이혼을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야, 이혼을 말하는 거라면 저렇게 물어보지 않겠지. 돌려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순수하게 아이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아이를 낳고 싶은 걸까?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건, 이 사람과 함께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면 무척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어서였다. 그래, 내가 개가 되었어도 행복을 찾을 수 있지. 바라 왔던 일을 위해 노력하는 건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 남편의 말대로 노력하면 될 수도 있다. 사실 내가 개인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을 한다면 안 될게 뭐가 있어, 그래, 그런데...



모르겠어. 다시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눈물이 갑자기 흐른다. 주룩주룩 끝도 없이. 눈물과 함께 꽁꽁 봉인해두었던 과거가 터져 나왔다. 잿빛의 과거가 툭, 눈앞에 펼쳐졌다. 내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날들. 잡고 싶었지만 잡지 못했던 그 아이. 아이를 잃고서 나는 한동안 내가 세상에 없었으면 했다. 우리의 행복을 내가 잘못해서 놓친 것 같아서, 모든 이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행복을 놓쳤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살았는데, 우리가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행복을 찾아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지럽다. 갑자기 터진 눈물을 보며 남편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져 갔다. 결국 우리 부부는 평소보다 반도 못 걸은 채 산책을 마쳐야 했고 평소보다 빠른 시간에 잠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우리는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건강식도 챙기고, 운동도 했다. 안 먹던 비타민도 먹었다. 몸이 건강해야 임신도, 출산도, 육아도 수월하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인지, 우리는 비교적 빠르게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임신 테스트기에 선명한 빨간 줄 두 개를 보았을 때 행복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제 행복이라는 방향으로 한 발자국 걷는구나, 싶어서 행복했다. 세상이 봄이었다.



순조롭게 임신이 진행되었다. 검사가 좀 많아서 놀랐고, 챙겨야 할 것들도 많아서 또 한 번 놀랐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임산부가 겪는 고통을 보며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도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일쯤, 누구나 겪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하는 걸 뭐. 그런 두려움이 마음속에 넓게 펼쳐지기도 전에 뱃속의 아이는 서둘러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초음파 검사로 꼬물거리는 아이를 보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입체 초음파로 아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남편과 나는 서로 자기를 닮았다며 우쭐해했다. 어느 날 발차기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무척 놀랐다. 그렇지만 아기와 나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시작된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렜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계속될 줄만 알았다.



어느 날, 정기검진을 받고 난 후였다. 의사가 어두운 얼굴로, 아기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말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아기가 지금 자고 있는 거예요. 죽은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바람이 피슉하고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이상하게 힘을 잃었다. 그리고 일어서려다가 핑글, 앞의 풍경이 돌았다.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 나는 이 무서운 현실을 직감했다. 아기는 죽었다.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나의 정원 같은 삶에 회색빛이 돌기 시작했다. 원래 출산 휴가를 쓰기로 결심하고 회사 일을 사간 차를 두며 차분히 인수인계하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 자체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나에게 우울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결국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던 회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집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가끔가다가 낮에 산책을 하면 꼭 아이들을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쾌활하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나 귀여운 아이를 안은 엄마들을 보면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할 수 있었는데, 나도 저렇게 행복할 수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멈추질 않았고 결국 눈물바람이 되었다. 그래서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산책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저녁이나 새벽 시간대에 했다.


사모예드란 개는 그렇게 해서 만났다. 어두운 밤 길에서 환하게 빛나는 개 한 마리가 주인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웃는 듯한 얼굴로, 풍성한 털을 하늘거리는 그 개는 입김이 일렁이는 겨울밤의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우리 아이가 태어날 시기도 겨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겨울, 우리 아이는 환하게 빛났을 것이다. 저 해맑은 개처럼. 우리의 아이를 품에 안으면 나도 환해졌을 텐데. 사모예드를 보며 상상한 행복은 사모예드를 따라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그런 바람으로 내가 사모예드가 된 것일까. 원래 나는 개였는지, 아니면 이런 희망들이 실제로 현실이 된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결국 작업실로 사용하는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벽이 되어 겨우 침실로 돌아가 잠에 빠졌다. 남편은 이런 나의 모습에 눈치만 보다가, 내가 잠든 사이에 출근해버렸다. 우리 부부는 도대체 어떤 미래로 향하고 있는 걸까.




이전 08화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간다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