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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디자인 Oct 15. 2021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인생엔 한 가지 답만 있는 게 아니니까



침대에서 눈을 떴다. 새벽에 잠들었던 탓인지, 평소라면 일하고 있을 시간에 여전히 침대에 누워만 있다. 한낮이 되도록 잠을 잘 수 있었던 건 침실을 효과적으로 감싸는 암막 커튼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본다. 어둑한 공간 속에서, 커튼 사이로 강한 햇빛이 빼꼼, 비친다. 이제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면서도 나는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암막 커튼만큼이나 어두운 색의 커버가 입혀진 침대는 자꾸 잠들라고, 침대 속에 파묻히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남편이 없는 집은 왠지 모르게 휑하게 느껴진다. 남편은 그런 존재다. 공간을 채우고 따뜻하게 만드는 존재. 시댁에 처음 갔을 때도 느꼈던 분위기가 우리 집에서 느껴진다. 남편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다. 그런데 나는 그런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잊고 있었는데, 아이를 잃은 상처가 그렇게 컸던 모양이다. 내색을 안 한 내 잘못도 있지만, 가끔 남편은 그렇게 무심하다. 서운해. 아무리 나와 잘 맞아도, 아무리 다정다감해도 남편은 내가 될 수 없다. 나의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순 없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 입는 것일 테지만.



나도 내가 강박적인 성격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생각이 너무나 많은 것도,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튀어버리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성인이 되어버렸고, 이 지긋지긋한 성격을 떨쳐낼 수 없다. 문신처럼, 내가 갖춘 이 성격과 성향은 이제 찰싹 달라붙어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나와 성격과 성향이 다른 남편과 사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내가 못 보는 것을 보게 해 준다. 미처 몰라서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경험하게 한다. 남편 또한 나의 모습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했다. 그러면 된 걸까. 순조로워 보이는 결혼 생활에 내가 괜히 생채기를 내고 있는 건가 싶다.



나도 알고 있다. 아이는 다시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렇게 상처 입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건, 그동안 내가 입은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몸만 회복했을 뿐, 정신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나약한 인간, 아니, 개가 되어버렸을까. 예전의 나는 그 누구보다 꿋꿋했는데. 지금 필요한 건 결혼하기 전 살아왔던 강한 정신력이 아닐까. 그러지 않으면 나나 남편이나 계속 상처 입게 될 것이다. 정신 차려. 이젠 어린애가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며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기분 탓인가. 찌뿌둥한 거 같기도 하고.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갔는데, 내가...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게 뭐지? 왜 갑자기 사람이 된 거지? 당황스러워서 한참을 서서 거울만 멀뚱히 쳐다봤다. 개가 되었을 때에도 놀랐는데, 다시 사람이 되었을 때에도 그 못지않은 충격이 몸 전체에 휘몰아쳤다. 예전 모습 그대로, 아니, 머리가 조금 길어진 채로 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나도 나를 모르겠다.



남편에게 바로 말할까 하다가, 메시지로 전하면 영 믿을 것 같지 않아서 퇴근 시간까지 기다렸다. 내가 사모예드가 아니니, 털도 잘 날리지 않을 거고, 산책도 예전만큼이나 하지 않아도... 음, 산책은 해야겠다. 아무튼, 남편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조금 놀라도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차분하게 기다렸고, 남편은 내 예상대로 놀라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기뻐했다. 다행이야, 라면서 와락 껴안는 남편의 모습에 나 또한 기뻐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껴안고 있다가 둘 다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바보 부부 같으니.



사람이 되었어도 우리 부부는 내가 사모예드가 되었을 때처럼 산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난하게 적응해버리는 우리 부부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산책을 하다가 동네 개를 만나도 개들이 나를 반기지 않는다. 그게 조금 서운하다. 나는 이미 쟤네들의 성향 (언제 산책을 나오는지, 어떤 나무에 영역 표시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등)을 다 알고 있는데. 마주쳐도 꼬리를 흔들지도 않고 나에게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내가 개가 아니니까 친구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또한 개들을 스쳐 지나갔다. 이런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모예드가 된 건 한순간의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시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뭉글뭉글 피어났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남편에게 다시 아이 계획을 이야기하자고 결심했다. 이번엔 좀 더 심혈을 기울여서, 아이를 잃지 않도록 신중하게 계획을 진행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려면 역시 공간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래서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는 고급스러운 테이블보에, 거기에 어울리는 접시와 커트러리를 세팅해놓았다. 분위기의 정점은 조명이라고 생각해 귀여운 촛대와 초까지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도 노릇노릇하게 구워놓고, 고기에 어울리는 채소도 준비했다. 이런 요리와 어울리는 건 와인이라며, 부랴부랴 와인도 사 왔다. 머릿속에 구상한 대로 꾸미는데 시간이 꽤 걸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왔다!



"여보? 무슨 날이야? 어우야아~ 완전 내 스타일 디너다!"



남편의 호들갑에,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이야기를 꺼내도 좋겠지.



여보. 나 할 말이 있어.


"응응, 말해봐요. 와- 여보 이 스테이크 최고다! 정말 맛있어! 와인이랑 찰떡궁합이네!"


고마워. 내가 한다면 또 하는 사람이잖아. 이렇게 차린 건, 다 할 얘기가 있어서야.


"뭐야, 뭐. 괜히 긴장되네. 자, 말해봐."


.... 이제 다시 아이를 가져볼까 해.



신나서 흥흥거리며, 한 입 가득 스테이크를 씹고 있던 남편이 씹고 있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이런 말은 생각지도 못 했다는 듯, 무척 놀란 표정이다. 겨우 입에 물고 있던 고기를 씹고 삼키고 와인을 한 모금 꿀꺽 삼킨 남편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이를 가지려고 생각한다고? 저번처럼 딸-아들 노선으로?"


응. 그렇게 해서 완벽한 4인 가족이 되는 게 내 꿈이라고 했잖아. 많이 늦춰졌으니까, 서둘러야 해.


"음... 그러니까... 여보, 나는 그렇게 급하게 아이를 안 가져도 된다고 생각해.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난 여보가 너무 계획에 따르려고만 해서 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우리 부부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를 고민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남들은 다 아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걸.


"남들은 남들이고, 우리는 우리야. 왜 남들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을 동일시하려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거 같아. 난 계획에 맞춰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도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는 거잖아. 그래서 우리 부부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잖아.


"아니... 나는... 여보가 완벽한 모습이 아니어도 돼. 난 당신이 완벽하게 계획에 맞춰서 사는 모습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 여보를 좋아할 뿐이야. 나는 여보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아니, 그냥 너 자체, 존재를 좋아한다고."


나도... 여보라는 그 자체가 좋아.


"우리가 이렇게 서로 좋아하고 행복하면, 아이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닐까? 내가 답답해서 주변 친구들한테 물어봤는데, 아이가 계획대로 맞춰서 생기는 건 어려운 일이래. 계획하다가 그만두면서 아이가 생기는 경우도 있고. 나는 여보가 마음을 좀 풀어야 된다고 생각해."



내가 마음을 풀지 않는다? 경직되었다는 말인가? 남편과의 논쟁에 머리가 핑핑 돌 것만 같다. 아니, 머리가 도는 건 답답한 마음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기 때문일까? 술이 센 편이 아닌데 너무 들이킨 건가? 아무튼, 내가 계획대로만 살아온 것은 인정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가 벌컥 생겨버리면, 아이의 미래는? 아이를 키우려는 마음가짐이 먼저 생겨야 아이를 바로 키울 수 있는 거 아닌가?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우리를 키웠고,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는데... 뭐부터 잘못된 거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면서, 마음속에 깊게 뿌리 박혀 있던 무언가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뽑혀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격렬하게 오간 대화 이후에 아무 말 없이 우리 부부는 서로를 보며 와인만 주고받았다. 할 말은 많지만 함부로 내뱉었다간 누군가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와인만 홀짝대고 있고, 남편 또한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며 와인을 마시고, 차려놓은 음식을 우걱우걱 먹고, 또 와인을 마신다. 그러다가, 답답하다는 듯이 남편이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내 말은, 여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아니고, 여보 인생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야. 여보, 여보는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그리고 법 없이 살아도 될 만큼 곧은 심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여보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돼. 그렇게 살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찾아올 거라고 믿어. 나 여보 엄청 사랑해."


응.


"나도 아이를 원하지만, 아이를 낳아도 여보를 사랑하는 것만큼 아이를 사랑하진 않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내, 김지수고,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거지,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아이를 갖진 않을 거야."


응.


"그동안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살아온 우리 아내, 정말 장해. 나는 그 아내를 진짜 사랑하고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나는 언젠가, 꼭, 아내와 우리 아이와 행복한 가정을 이룰 거다!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 불안하지 않아도 돼!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한다는 거잖아. 안 그래, 여보?"


응. 여보 말이 맞아. 우리 서로 사랑하면 그걸로 된 거야.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아니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아니, 이미 남편과 나는 눈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다. 사모예드에서 사람이 되었을 때처럼, 우리 부부는 또 바보처럼 울고 또 울었다. 남편의 말이 꼭, 표창장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을 받는 것 같은,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만 같은 그런 뿌듯함이 내 몸 전부를 채우는 기분이다. 남편이 날 좋아하고 나의 모든 것을 인정해 준다. 그러니까 굳이 세상에 맞춰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 앞으로 우리가 무슨 일로 싸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일은 꼭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천하무적이다.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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