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거지집 첫째 공주님은 당황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공주님.
나는 내내 그렇게 살았다. 내가 태어났던 순간은 경이로웠으니까. 친가는 줄줄이 아들잔치였다. 뭐가 하나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책 좋아하는 말랑이는 추앙받았다. 외가에서는 비혼을 선언하고 십여 년째 한 사람과 연애만 하고 있는 이모* 덕에 여전히 귀여운 첫째 공주님 역할을 맡고 있다. 외할머니 집에 가면 내 또래는 나 포함 딱 2명이다. 나와 내 동생. 심지어 나의 부모님은 결혼을 일찍 하신 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모나 삼촌이라고 부르는 부모님들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른들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패션쇼가 열렸고 신기한 장난감이 생겼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안 되는 건 없었다. 그게 나의 피 터지는 노력이었든 누군가의 열렬한 사랑이었든. 나는 나를 통해 가치의 희소성에 대해 배웠다.
내가 아무리 예쁨 받는 아이라고 해도 명절 잔소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어른들의 참견도 해마다 무궁무진하게 발전하니까. 진로, 입시, 취직, 다이어트, 이후에는 결혼 이야기까지. 누구는 어디에 갔고 누구는 무얼 했다 비교까지 당하는 게 참 스트레스다. 나는 ‘첫 딸’이었고 공부도 꽤나 잘했으며 언제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도 그 소재가 밥상에 올라오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빴다. 이러다 체하겠어요. 하는 말을 수없이 삼켰다. 아. 삼키진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추석에 논술학원에 가야 해서 점심만 먹고 일어난다니까 큰 아빠는 비아냥거렸고 한 번 크게 받아친 적이 있었지.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무슨 대학이냐니. 대학 준비하는 게 상전이냐느니 하는 말은 21세기에 참 안 어울리는 말이다.
”저 확 내년에 성인 되자마자 결혼해 버려요. “
“그럼 우리 엄마아빠도 명절에 여기 안 와요. 저랑 남편 인사받아야지요.”
결혼은 안 했지만 이후로 친가에 방문한 적은 없다. 명절 때만 되면 핑계를 만드는 게 일이었는데 보통은 명절 단기 아르바이트를 일부러 잡거나 과제를 해야 해서 학교 앞 자취방에 있어야 할 것 같다거나 선배들을 따라 현장에 나가야 한다는 내용들이었다. 사실이지만 계략이었다. 꼰대들만 모여 본인들이 만들어낸 자아 있는 마네킹을 품평하는 자리는 최악이니까. 여러 번의 이직이 있었지만 현재 직업인 프랜차이즈 카페 종업원**도 같은 의미에서 마음에 든다. 공휴일에 고강도 근무를 해야 하는 일. 짜릿하다.
“응, 이번에도 못 가게 됐어. 우린 지금이 성수기거든.”
이런 내가 스스로 명절 연휴 5일 연속 휴무 신청을 내었다. 예비 시댁 부모님과 인사도 나눴고 상견례도 했고. 결정적으로 시부모님이 해주신 작은 신혼집에 살림을 합친 상황이었다. 일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던 내가 일터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짝꿍을 업어 키우셨다는 할머님께 인사도 드리고 해외에서 돌아오신 삼촌도 뵙자고. 앞으로 언제 또 명절에 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명확한 사유로 휴무 신청을 할 수 있을 때 하고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하자는 게 무려 내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건 큰 충격과 거대한 공포였다.
주방엔 할머님이 계셨다. 갈비를 열심히 굽고 계셨는데 그 갈비는 할머님의 사위인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위인 아주버님의 것이었다. 밥상은 2개였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았다. 새로 구운 갈비는 남자들 상에, 여자들 상에는 어제 구워 먹고 남은 빳빳한 고기가 올라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안마의자를 하던 아주버님과 티브이를 보던 아버님이 상석에 앉았다. 형님과 어머님, 할머님은 밑반찬까지 모두 차린 뒤 여자들 상에 앉았다. 모두 함께 상을 차리고 모두 함께 따뜻한 새 밥을 먹어본 경험밖에 없었는데... 이런 세상이 여전히 존재하는구나. 물론 당사자가 되어보니 흥미롭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부엌에서 우물쭈물하는 내게 아버님께서
“아가는 이리 와서 앉아 쉬어라”
하지 않았다면 나도 아마 내 남편의 것이었을 갈비를 굽고 나물을 무쳤겠지. 어른들께서, 특히 할머님께서 두 손 걷어붙이고 일하시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기란 많이 민망했지만 내가 본 최고의 가부장적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이 깍 깨물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철없는 막내며느리인 척 견디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쉬다가 자연스럽게 남자 밥상에 침투해서 복스럽게 밥 먹기.
한 번도 쳐본 적 없는 고스톱을 구경하며 눈치로 호응하기.
집에 가고 싶다고 말 못 하고 짝꿍이 일어나주길 간절히 기다리기.
그 집 사위는 뻔뻔하게도 어른들 앞에서 담배 태우러 가고 싶다고, 이제 졸리다고 잘만 말하는 게 억울했다. 점심에 우리 집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온 짝꿍이 밥을 다 먹고 배 부르다고 하자 “그러게 남자가 준다고 다 받아먹으면 어떻게 해!” 하던 할머님의 말씀***도 내 마음속 비수로 꽂혔다. ‘우리 할머니가 억지로 먹인 게 아니라 쟤가 혼자 맛있어서 많이 먹은 거라고요.. 우리 할머니는 무리해서 먹지 말고 남기라고 했다고요...’ 하고 싶던 대꾸는 목 안에 칼칼하게 맴돌다 사라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쓰라린 기분이었다.
서럽게 울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크게 소리 내어 운 건 처음이었다. 짝꿍의 가족을 욕하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었고 또 우리 부모님껜 걱정시키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좁은 틈을 내어주자 삐져나왔다. 이제 너네 집 안 갈 거라고, 최대한 다 네 선에서 해결하라고 떼를 썼다. 어쨌든 사랑이었다. 그렇게 싫은 꼴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일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보물을 가진 기분이다.
Girls can do anything!
아무튼 내가 갖고 싶은 건 가져야겠다.
*
비혼주의자 이모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롤모델이었다. 40대 후반에도 연애만 할 수 있는 멋진 싱글. 어디서 그런 가치관이 잘 맞는 남자를 만났는지 그분도 비혼주의라고 했다. 비혼여자가 중년이 되면 외롭다는 이야기들에 믿음이 안 간 것도 이모 덕분이다. 우리 이모는 결혼 안 해도 빛이 나니까. 결혼해도 빛나는 엄마를 보면 결혼이 여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하기 나름이지. 아무튼 미디어가 만드는 프레임이 문제다. 문제.
**
프랜차이즈 카페 종업원의 장점은 명절에 일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곧 퇴사한다. (제법 신이 난 상태) 마지막 근무를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무사히 다음 직장에 안착하면 새로운 매거진으로 [진상 대 백과사전]을 연재해보려고 한다!
***
그 당시엔 나의 자격지심과 소심함, 당황스러움이 섞여 우리 집을 나쁘게 생각하나? 하고 크게 상처받았지만 이제는 안다. 짝꿍의 어른들은 악의가 없다. 그냥 짝꿍이 살찌는 것에 대한 잔소리였을 것이다. 이래서 결혼은 가정의 합침이라고 하나보다. 나도 시댁 어른들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하고 이제야 편안해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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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합치고 한창 결혼준비를 한다고 이 카드 저 카드로 할부 대잔치를 벌이던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나의 건강 이슈. 힘과 팔, 손목을 많이 쓰는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직업인 내게도 드디어 직업병이 도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위급 상황이라고 병가를 권유했고 신경주사를 5방이나 찔렀다. 물리치료나 받으면서 설렁설렁 일하려고 했는데 졸지에 강제 무급휴가가 생겼다.
함께 이겨내야 할 첫 번째 관문이 열렸다. 우리는 더 이상 애틋한 연인이 아니라 함께 세상을 헤쳐나갈 할 전우가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