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환상

지옥으로부터 나를 건져내 줄 한 줌의 환상

by 꿈꾸는 카프카

환상(幻想)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나는 최근 한 드라마에 깊이 빠져있는 중이다. 10대, 20대 청춘들의 성장과 도전. 사랑이야기를 담은 그 드라마는 요즘 누구에게나 장안의 화제다.

원래 나는 남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여기서 ‘남들이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이 대중적이거나 일반적인, 즉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관심을 보이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내가, 그랬던 내가, 아주 오랜만에 남들이 열광하는 그 무언가에 함께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세상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아니 버티기조차 힘든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일상의 연속에 그 드라마를 보는 것은 내게 아주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

흔히 덕후들에게 그러하듯. 그것에 빠져 있는 시간만큼은 나를 괴롭히는 온 세상의 모든 요소들이 우주 바깥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건 평소의 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니다. 이렇듯 나는 요즘 평소답지 않은 나의 모습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고, 그래서 대체 그 드라마의 어떤 요소가 날 이렇게 만든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


아마도 날 이렇게 만든 것은 그 드라마에 나오는 극 중 여주인공의 유일무이한 캐릭터 때문일 것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김태리.jpg 최고의 펜싱선수를 꿈꾸는 열여덟의 나희도. 그녀의 꿈을 향한 도전과 열정이 나를 꿈틀거리게 만든다.


18살의 펜싱 국가대표 선수를 꿈꾸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드라마의 대서사는 단연 이 여자 주인공이 이끌어나가는 꿈과 사랑. 희망의 에너지로 극이 압도적으로 주도되어 나간다.

일찍이 아빠가 돌아가시고 바쁜 엄마 때문에 조금 외로울지언정 언제, 어디서나 밝고 씩씩한 소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어느 순간에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그것도 아주 잘, 해내는 아이.

그리고 그런 소녀를 알아봐 주고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그에 못지않게 멋진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의 남자 주인공까지...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는 드라마가 흥행할 때 갖춰야 할 웬만한 요소는 다 갖추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 요즘의 30-40대 성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1990년대 말 레트로 감성까지 더해지니 이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여자 주인공이 갖는 독보적인 캐릭터이다. 특히나 나처럼 할 말 다 못하고 사는 쫄보에 세상을 바라보는 다소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라면 더욱이 이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이질적이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캐릭터가 뿜어내는 나와는 전혀 다른 면에서 비롯되는 이질감 때문에 그 인물에 매료된 것만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의 격으로, 그 인물의 일부 어떤 부분에서는 예전의 내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어떠한 공통점을 찾았기에 나는 더 깊게 그 캐릭터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캐릭터에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18살의 나도 저때는 그랬을지 모른다는 어렴풋한 기억들. 아니... 분명 그랬었다는 확신,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음에서 오는 아쉬움과 그렇기에 더욱이 짙어지는 그 시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떻게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그 시절의 나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간절한 애잔함이 드라마가 시작되는 그 시간이면 나를 TV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그 바람이 현실이 될 수 없기에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세상 속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욱 짜릿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 회차, 한 회차 시간이 더해질 때마다 나는 요즘의 지친 나를 지탱하게 하는 내 유일한 환상이 조금씩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늘 환상 속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쓰디쓴 현실의 벽 앞에 부딪혀 멈춰 선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10대 소녀도 아닌 나이에 무슨 드라마 하나에 미쳐서 그러냐고 핀잔을 들어도 상관없다. 누가 뭐래도 난 지금 열정적으로 그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세상 속에 빠져있다. 이렇게 무언가에 깊이 빠져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다음엔 어떤 이야기들이 내 딱딱해진 가슴의 문을 두드릴까. 그 생각만으로도 내일이 기다려진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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