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일개미 1
오늘도 베짱이는 푸르고 가는 잎사귀가 땅을 향해 늘어진 어느 즈음에 자리를 잡는다.
새벽에 내린 이슬하나 조심히 머리맡에 베고 파랗고 드넓은 하늘을 마주하며 햇살을 받으니,
세상천지 부러울 곳 하나 없다는 생각에 노래가 절로 나온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나나나나나나"
그 아래로 어디서 주웠는지 식빵부스러기 하나 끌고 끙끙대며 걸어가던 일개미 1 이 흘러드는 노랫소리에 가던 길을 멈춘다.
"야! 너 오늘도 또 한량처럼 노래나 쳐 부르는 거야? 너는 언제 철들래?"
일개미 주제에.
무척 가시 돋다.
"철이 뭔데?"
여전히 흥얼거리며 베짱이가 대답한다.
"한번 태어났으면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지. 나 봐봐, 노력하니까 숫자 1도 이름뒤에 붙일 수 있었다구"
말하다 보니 왠지 으쓱해지는 느낌도 든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 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 않네~"
베짱이는 상관도 하지 않고 더 크게 노래를 불러댄다.
개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베짱이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 다시 집으로.
고단한 발걸음을 옮긴다.
늘 비슷한 날들, 며칠이 흐른다.
커다란 소시지가 떨어져 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가봤지만,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다. 그 소식을 처음 전했을 뿐인 일개미 33이 동료들의 분노에 못 이겨 집단 린치를 당하고 결국 마을을 떠나야 했다.
-마음이. 불편해.
터덜터덜.
동료를 애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속에도 그는 두리번거리며 다른 먹거리가 없는지 촉각을 곤두 세운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이는 혼자 남아 집을 보오다가아아"
어김없이 베짱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가뜩이나 기분도 엉망인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다.
그런데.
일개미 1,
네가 왜?
"야, 작작 좀 하라고! 넌 평생 일도 안 하고, 세상에 태어나서 해놓은 것도. 이룬 것도 하나 없는, 세상 악 같은 존재야.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존재는 바로 너라고, 알아?"
뚝 노래가 멈춘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게 너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야?"
평소처럼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아닌,
무언가.
풍선에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자조 섞인 목소리.
일개미 1도 한껏 쏘아붙이려던 자세에서 한 풀 꺾인 채 대답한다.
"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보는 내가 답답해서 그래. 넌 도대체 왜 노력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나 노력하는데. 노래 하고 싶어서. 잘 부르려고 매일 연습하는데."
"하... 됐다."
일개미 1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베짱이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잠시라도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희망을 느꼈던 스스로를 탓했다.
"나 간다. 할 일이 잔뜩이야."
"듬뿍 듬뿍 듬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베짱이가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그래도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볼 줄 알았는데.
몇 걸음 지나지 않았을 때, 베짱이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힘껏 소리치는 게 들린다.
"내가 너처럼 열심히 일만 할 수 있었으면, 나는 베짱이가 아니고 일개미 2였을 거야! 1은 네가 하고!"
피식,
콧웃음이 나온다.
-노래가 뭐라고...
그런데.
일을 한다는 건.
그럼
뭐지?
베짱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잔소리를 퍼부어대던 일개미 1의 목소리가 멈춘 지 닷새나 흘렀다.
그는 풀잎에서 내려와 일개미 1의 집을 찾아 길을 나선다.
-요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기웃기웃하는 사이에 집을 짓느라 분주하던 일개미 하나가 베짱이를 보고 묻는다.
"어이, 노래하는 한량 아니야? 여기까진 웬일로 행차야?"
"아... 며칠 동안 일개미 1 이 안 보이는 것 같아서. 일하러 멀리라도 나간 거야?"
"일개미 1? 아... 그게. 강물 근처에 누가 버려놓은 참치캔 하나 있다고 그거 들고 온다고 나갔다가."
"?"
"갑자기 비가 내리면서 강물에 휩쓸려 간 것 같아. 돌아온 몇이 그러더라고."
지끈.
무언가가
심장을 확 움켜쥐었다가
놓는다.
뒤를 돌아 걷는 베짱이의 어깨가 그 어느 날보다도 축 처져 있다. 등에 달린 짧은 날개가 질질 끌리고 있을 정도로.
-인사였는데. 안부였는데. 오늘도 살고 있다는 너의 목소리였는데.
시끄럽기만 하던 하루가.
그립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 오르네."
베짱이는 작은 목소리로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부른다.
다시 태어나면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는 하얀 털의 페르시안 고양이 한 마리가 아까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방석 위에 기대듯이 앉아있다.
약간은 회색빛도 감도는, 풍성한 털로 뒤덮인 꼬리를 살랑살랑. 마치 왕의 곁에서 더위를 쫓아주기 위해 흔드는 미선(尾扇)처럼 느리지만 우아하게 꼬리를 움직인다.
반면 그가 아까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쫓고 있는 그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생명체.
며칠 전, 주인아저씨가 지하주차장에서 주웠다고 말하며 집으로 들여버린.
털은 짧고 코만 긴 강아지 한 마리.
삼복더위에도 24시간 꺼지지 않는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유지되는 방 안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공 하나 물었다가 던졌다가 인형하나 물어왔다가 뱉어냈다가. 발발거리고 뛰어다니는 게.
-쟤는. 대체 왜 저 모양일까.
이윽고 고양이가 도도한 목소리로 입을 뗀다.
"넌 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는 법도 모르냐?"
"사색을 왜 해야 하는데?"
"생각을 해야 깊이 있는 행동도 할 줄 알게 되고, 행동이 바라야.."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버리는 강아지 색. 무슨 색.
퇴근하고 돌아온 주인아저씨는 반갑다고 달려드는 강아지를 안고 뽀뽀하고 애정을 준다.
-계속 저러면 쟤 좋아서 기절할 텐데...아저씨! 계속 하세요.
페르시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 발을 쭉 뻗어 기지개 한 번을 시원하게 하고는, 아저씨 얼굴은 보지도 않고 괜스레 두리번두리번 하며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의 가까이로 다가서자 크고 부드러운 손이 천천히 머리부터 꼬리께까지 쓰윽 훑고 지나간다.
-이 정도면 됐어.
방에서 공부하는 줄 알았던 딸아이 하나가 다다다 달려 나와 아빠를 부르며 품에 안긴다.
아저씨도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딸아이를 꼭 안아준다.
그렇게 힘주어 안는 통에 딸아이가 들고 있던 손거울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린다.
잠시 뒷전으로 물러서 있던 고양이와 강아지가 조금씩 다가가 물끄러미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뭐지?
-뭐야?
고양이가 본 자기 모습에는 베짱이가, 강아지가 본 자기 모습에는 일개미 1 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일렁이는 물결처럼 조용히 흩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