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여름의 비행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친구 사이


영희는 물끄러미 철수를 바라본다.

분명히 어제만 해도 코딱지나 파먹던 쪼꼬미 같던 게, 언제 이렇게 커진 거지?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토끼풀 왕관을 엮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전체적으로는 가늘지만 가슴만은 태평양도 품을 듯이 벌어져있고, 그의 쭉 뻗은 다리는 유난히 길고 탄탄해 보인다.


눈치채지 않게 바닥부터 훑으며 그의 짧은 턱, 입술, 그리고 눈을 바라본다.


눈은 항상 나를 보거나, 아니면 내게 줄 무언가를 보고 있거나.


두근.

이 소리 뭔데?


낯설어.

그런데.

계속 낯설고 싶어.


"자."


철수가 완성된 토끼풀 왕관을 영희에게 건넨다.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뭐, 이 정도면 나한테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영희는 도도하게 고개를 들어 윤기 흐르는 입으로 얘기한다.


"네가 한번 씌어줘 보던가."


"아. 훗, 그래"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한번 짓더니 일어나서 영희의 머리에 왕관을 씌운다.

그런데,


"뭐야, 너 언제부터 날개가 이렇게 자랐어?"


며칠째 보이지 않다가 오늘 불쑥 나타난 그의 등 뒤에는 이미 길게 늘어진 날개가 붙어있다.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더 이상 수줍은 미소가 아니다.


"나도 이제 너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되었어, "


"뭐?"


철수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는다.


"처음 널 보았던 날부터. 난 너에게 한눈에 반했어. 그리고 매일매일 계속 너에게 반하고 있어.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너를 계속. 사랑해도 될까?"


영희는 벌떡 일어나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을 집어 바닥으로 내던진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누가 너더러! 무슨 네까짓게 나를 사랑한다는 거야!"


악을 쓰듯 소리를 내지르며 영희는 혼자 남은 철수를 뒤로하고 집 쪽으로 달려간다.

그녀의 등 뒤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날개가 오늘따라 유달리 반짝이는 듯하다.


너 같은 게, 너 같은 게 왜!

정말...


죽고 싶은 거야?



혼인 비행


똑똑똑.


문이 열리고 유모가 들어온다.


"아직도 주무세요? 이제 그만 준비하셔야죠., 어휴 며칠째 방에만 틀어박혀서 나가보지도 않으시고."


커튼을 확 걷어 치운다.


영희는 아직도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며칠째. 젖어있는 그 배게 위에서.


"창문 좀 봐요. 날이. 정해졌어요. 오늘 오후가 될 거예요."


"뭐?"


영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가 왔었다.

땅의 열기가 바뀌고.

밤이 짧아졌다.


그날이다.

혼인비행.


"싫어어어어어어어-!"


우아앙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그 말이 온 동네사람들 다 듣도록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유모는 영희의 몸을 닦고, 혼인복으로 갈아입히고 날개를 정성스레 매만진다.

유모의 손길에 따라 흔들거리는 그녀의 눈빛은 며칠 전 방문 앞에 놓여 있던, 토끼풀 왕관에만 멈춰있다.


준비를 마친 유모가 망설임 없이 문을 활짝 연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여왕개미가 되는 거예요.

꼭 힘을 내세요.



운명과 숙명


온도도 습도도 빛도...

날이.

적당하다.


땅 위에선,

이미 처녀개미와 수개미 몇이 날아올라 비행을 시작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숙명.


영희는 두리번거리며 철수를 찾아본다.

다행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 차라리 멀리 도망가 버리라고.


영희도 힘껏 비상을 시작한다.

교미를 할 준비가 되었다.


보다 빠르게, 보다 높이.


가장 높아!

순간,

그녀의 앞에 선 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철수.


그의 커다란 눈을 마주 본다.

눈물이 차오르고 있는 걸.

너는 알아?


"영희야. 나의 정자를 받아."


철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영희는 힘차게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 난. 이대로. 이것도. 내 운명이야."


네까짓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툭.

툭.

떨어진다.

내 마음의 사랑도.


남는 자가 슬픈 걸까.

가는 자가 더.

슬퍼야 하는 걸까.


"가장 건강하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계속 단련했어."


그녀의 날갯짓도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파르르 떨린다.


"계속 살아줄 거지?"


조금씩 다가온다.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 수가 없어.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운명이라 하고.

나는 숙명이라 울어.


교미를 마친 수개미는 바로.

추락한다.


안녕.

...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영희는 조용히 땅으로 내려와 나만의 둥지를 만든다.


"살아남을게. 기억할게."


어차피.

모두.

찰나일 거야.


여왕개미의 비행을 지켜보던,

한 인간이 나지막이 읖조린다.



(끝)

keyword
이전 07화양들의 합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