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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어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올 겨울은 더욱 길고 매서운 것 같다.


며칠 동안 지속되는 눈보라 속에서, 어떻게든 겨울을 나야 하는 숲 속의 동물들은 이제 하루 걸러 하루 굶기 일쑤이다.


그렇게 바짝 메마른 나무 사이로 아기 호랑이 한 마리가 한 발 한 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호랑이의 탈과는 별개로 엉덩이가 작고 도톰한 것이 어린 아기의 것과 같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어귀 사슴과 여우, 너구리와 다람쥐 등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저... 무슨 얘기들을..."


호랑이는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회의 탁자 옆에 발걸음을 멈춘다.

하지만 그 순간 찾아드는 정막.

모두가 떠들던 입을 딱 다문 채 호랑이를 쳐다보기만 한다.


"아니, 우리는 별거는 아니고... 호호호"


"랑이씨는 먹을거리 걱정도 없겠네, 저 큰 덩치로 아무거나 잡아먹으면 되지 않나"


"그러게, 나는 모아둔 도토리도 이제 다 떨어져서 당장 내일 아침거리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인데 말이야."


침묵을 깨고 한 마디씩 던지는 말이 왜인지.

곱지만은 않다.


"아... 죄송합니다."


호랑이도 이 추운 겨울 산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풀 몇 개 뜯어먹은 것이 고작이었다.


드문 드문 음식을 가져다주던 옆 집 노루할머니도 어느 순간부터 발길이 뜸해지더니 이제 아예 얼굴도 보기 힘들어진 지 벌써 한 달이다.


아기 호랑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가는 길 사이사이 다른 동물들의 집들이 간간이 이어져 있지만, 그 앞에서 놀던 어린 동물들도 으악 호랑이다 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배도 고프지만.'


힘든 몸을 더욱 무너져 내리게 하는 건.

외로움.


으슬으슬, 더 이상 작은 온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집 안으로 들어와 냉큼 벗어던진다.


도르르 굴러가는, 호랑이의 탈.


한 달 전, 누군가가 나의 집 앞에 버리고 간 '탈'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내 모습인 고양이로 돌아와 탁자 위에 팔을 포개 지친 몸을 묻는다.


'호랑이 탈을 쓰고 다니면, 친구가 되어 줄 줄 알았는데.'


엄마 아빠가 없는 것이.

내 탓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롭게 살고 마는 것은.

내 탓인 걸까.


나의 구역 안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저... 한 번쯤은 나도 그들의 웃음에 섞여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게도 있었다.


그리고.

딱 한 번 들여다보았을 뿐인 그 바람은, '고독'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했다.


"이런 게 고독인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이렇게.

사라져도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겠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겠지.


춥다.

내가 느끼는 것은.

오직 그 감정 하나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이제 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는 그렇게 눈을 꼭 감아버린다.


눈을 감자, 나는 곧바로 다른 세상으로 옮겨진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어느 인간의 집.

엄마, 아빠 그리고 형제들이 마구 뛰어와 나의 온몸을 핥아주며 반긴다.


"어서 와, 아가. 혼자 힘들었지? 마지막 너를 놓쳐서 엄마가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데."


아빠?

아빠의 목소리 인가 봐.


"누나? 형?"

꼬리를 물고 몸을 포개고, 팡팡거리며 다가왔다 떨어졌다 하는 발길질이 너무나 좋다.


따뜻한 인간의 집 한 구석에 우리 집이 있다.

깨고 싶지 않다.


꽁꽁 얼어 움직임이 없는 고양이를 확인하자, 여우가 뻐기듯이 얘기한다.


"내가 말했지? 가장 빨리 보내버리는 방법은, 고독하게 만드는 거야. 키킥"


듣고 있던 다른 동물들도 머리를 끄덕이며 동조의 웃음을 보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사슴이 얘기한다.


"난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에휴. 나도 자식새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네..."


그 한마디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잠시 후, 너구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자, 이제 다음 차례는 어떻게 정하지?"


그러자 모두들,

조용히 사슴을 쳐다본다.

마음속에 파고드는 생각이 모두 같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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