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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탈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임무

어둠이 내려와 풀 숲을 까맣게 물들인다.

그러자,

누워 있던 개똥벌레들이 하나 둘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켠다.


"오늘도 벌써 하루가 시작이네."


이제 막 50일 차가 된 개똥대리가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가방을 멘다.


"에휴, 오늘 많이 주워와야 할 텐데요."


갓 들어온 신입도 한마디를 보탠다.


"야 신참, 걱정하지를 마. 어휴, 우리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날아도 다 줍지도 못할 만큼 많이 나올 테니까."


다른 개똥벌레들이 하나둘 날개를 털고,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자, 우리도 이제 슬슬 날아가보자고."


"넵"


대답과 함께 신입 무리들도 날아오른다.

그리고 모두들 눈에 광채를 켜고 실적을 채우기 위해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오직 호기심 많은 신입만이 개똥벌레들이 많이 모여있지 않은 더 먼 곳으로 비행을 해본다.


"어? 저건?"


잿빛이 아닌데도 온기가 느껴져.

신입이 비행을 멈추고 그 빛에 다가가려 하자,


"야, 저런 건 우리한테 필요 없어. 보스가 절대 가져오지 말라고 한 거잖아"


그에게 일을 가르쳐주고 있는 개똥대리는 단호하게 말하며 방향을 조정한다.


"아. 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세상도 다시 잠들어있는 생명들을 깨울 준비를 시작하려 한다.


흩어져 있던 개똥벌레들은 부지런히 꽉 꽉 채운 가방들을 움켜쥔 채 한 곳에 모여, 귀환을 시작한다.


그들에게 임무를 내린, 곰 아주머니의 집으로.


방 안에는 보스라 불리기도 하는 곰 아주머니가 소파에 파묻힐 듯이 기대앉아 천천히 담배를 태운다.

그녀가 잡고 있는 곰방대는 오래되어 갈색빛이 바랜 채로 그 끝이 바닥에 닿아있다.


방으로 들어오는 개똥벌레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줄과 열을 맞추어 하나씩 그녀의 앞에 선다.

그리고는 잿빛으로 가득 찬 가방을 각자의 앞에 털썩, 털썩 내려놓는다.


"그래, 오늘도 고생들 했어."


더 길었다면 가만히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


낮고.

가라앉은.

몇 살이나 된 걸까.


"이제. 들어가자."


그녀가 피고 있던 곰방대로 바닥을 따악-내려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 속의 잿빛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와 항아리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슬픔.

고통.

분노.

좌절.

질투.

무시.

절망.


불행이라 일컫는 잿빛의 감정들이.



어른의 탈


어느새 가져온 가방들이 모두 바닥을 드러내자, 항아리 안은 반대로 당장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은 잿빛으로 가득 찬다.


곰 아주머니는 드디어 그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켜 항아리 쪽으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천천히.

젓기 시작한다.


-저걸로, 뭘 하려고?


"이제 다들 나가봐."


윽, 쇠 긁는 소리.


"네"

"네"


대답을 마친 개똥벌레들은 모두 거실로 나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궁금한 게 많은,

그 이름은 신입.


신입은 작은 움직임도 없이 소파 한 귀퉁이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가방을 둘러메고는 막 나가려던 개똥대리가 다시 돌아와 발을 톡 찬다.


"뭐 해, 집에 안 가? 잠을 자야 내일 또 일하러 가지."


"네? 네... 그런데, 저 항아리로 보스는 뭘 만드는 거예요?"


"글쎄."


고개를 갸웃 거리는 개똥대리는 한 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신입이 오히려 신기하다.


"그리고 왜, 잿빛만 모아 오라고 하는 거지? 잠시긴 해도 다른 색을 띠는 빛도 분명히 봤는데"


부스럭부스럭-


둘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본다.


"후후훗. 드디어 궁금해하는 개똥이가 나왔구먼."


기척도 없이 그늘에 가려져있던 부엉할매가 글글글 하는 끓어오르는 소리를 내며 구석에서 몸을 드러냈다.


긴 세월에 몸은 왜소하다 할 수 있어도, 번뜩이는 그 커다란 눈만큼은 한 번에 마주 보기 힘들 정도로 빛이 나고 있다.


개똥대리는 자기도 모르게 날개로 얼굴을 가렸지만, 신입은 상대가 누구라도. 궁금한 건 물어야 산다.


그것도. 본론부터.


"할머니는 보스가 뭘 만드는지 아세요?"


"어른의 탈."


"어른의 탈?"

둘은 동시에 외친다.


"저 곰이 만든 어른의 을 쓰면 타인의 불행이 더 잘 보인단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


"물론 다 그렇진 않지만, 타인의 불행이 자신의 것보다 커야지 안심이 되는 사람들이 있거든."


신입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옆에서 함께 듣던 개똥 대리의 동공도 이미 평소의 두 배만큼이나 확장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저 탈을 찾는단다, 자신의 생명력이 대가인 줄도 모르고. 그 덕에 저 곰도 여태껏 사는 거지만. "


부엉할매는 그 둘의 반응을 보며 오랜만에 희열을 느낀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그럼 우리가 잿빛 말고 다른 빛도 모아서 만드는 건 어때요? 제가 분명히 봤거든요!"


신입이 묻고,


"하지만, 그건 보스가 금지한..."


개똥벌레가 말끝을 흐리며 부엉할매의 입을 바라본다.


"네가 보았다는 그 빛, 분명 따뜻했겠지. 그것들은 기쁨, 감사, 사랑 같은, 흔히들 행복이라 부르는 감정. 하지만. 찾기도 힘들뿐더러 다가가기도 전에 꺼져버리는 경우가 많아. 슬픔과 고통은 오래 끌어안고 있는 반면, 기쁨과 행복은 쉽게 놓아버리거든."


"그러면, 아무도 줍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다 어디 가는 거예요? 사라지는 거예요?


"아니, 쿨럭쿨럭"


너무 오랜만에 말을 시작한 것도 있지만

생각보다 길어지는 이야기에

부엉할매는 목이 아프다.


곰이 놓고 간 곰방대를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조금만 쉬었다 할까? 가서 물 좀 가져다 다오."


신입과 개똥대리는 서로 마주 보다가, 누구랄 것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간다.



인간의 완성


개똥대리와 신입은 방문을 사알짝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본다.

항아리를 젓고 있는 곰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만 일만 꾸준히 하면,,, 나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댔는데..."


개똥대리가 말한다.


"하지만, 남의 불행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게 인간이라면. 나는..."


신입이 힘없이 대꾸한다.

왜 억울한 마음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깜짝.

이번에도 부엉할매는 조용히 커튼틈 사이에 가려져 있다가 글글글 소리와 함께 등장한다.


"그런 탈이 없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고. 살아내는 어른들이 있지. 그런 사람들은 잘 알고 있어, 지나 보면 모두.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때가 되면 어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노인이라는 이름을 달기도 하더구나."


"행복만 쥐고 계속 살 수 있는 인간들은 없는 거예요?"


개똥대리가 놀라서 신입을 쳐다본다.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지.


"왜 없어. 네가 묻지 않았니, 그 잠깐 사이에 사라진 밝은 빛이 어디로 가는지 말이야. 그 빛들은 모두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로 흘러가거든. 물론 오래 남아있기도, 짧게 끝나기도 하지만 말이야."


쿨럭쿨럭.

부엉할매는 기침을 하며 두 꼬마의 눈치를 살핀다.


"그래도 인간이 되고 싶니?"


"잘. 모르겠어요."


개똥대리가 대답한다.

하지만

신입은.


"네. 저는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그래서. 그래서 이게 다 틀린 이야기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부엉할매는 그 밝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신입을 바라본다.


-그때가 되면 난 이미 죽었을 텐데.


목이 덜컥 꺾여버린 자신을 떠올린다.


"네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 이름은 희망이 될 수도 있겠구나."


희망...


"그러니, 할매가 가르쳐줘요. 그 방법을."


"네가 보여준다는 게 아니었어?"


개똥대리가 묻는다.


"..."


"소중한 걸. 더 오래 간직해야 해. 행복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 때처럼. 옆의 아이가 울면, 따라 울던 그 마음처럼."


"어린아이의 마음?"


"진심으로 같이 울어주는 것.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불행은 쉬이 흘러 보내주는 것. 나 혼자 웃는 게 아닌, 같이 웃어 가는 것. 그것이..."


작은 틈으로 열려 있던 문이 스윽 젖혀진다.

부엉할매와 두 개똥이 들은 화들짝 놀라며 곰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을까.


곰 아주머니는 천장에 닿을 듯 한 거구의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소파로 다가가서 그 몸을 누인다.


"그것이... 인간의 완성이지.

나도... 이제 그만 쉬고 싶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엉이도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희망은. 있어.


작은 새끼부엉이 한 마리가 바지도 입지 않은 어린 곰돌이의 어깨에 앉아 장난치며 까르르 웃던, 그 먼 기억 속 한 장면이 둘의 머릿속에 동시에 그려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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