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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쾅-


문이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끝났나?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한 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아니다.


"누구?"


빨래를 꺼내던 엄마는 잠시 손을 멈추고 현관으로 향했다.


"뭐지이?"


초등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벌써 하교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장난스러운 말투로 아이의 귀가에 응답한다.


아이는 털썩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소파 아래에 대자로 드러눕는다.


"거기 누우면 입 돌아가."


아직 난방을 시작하지 않았다.


"엄마. 학교는 왜 다녀야 하는 거야?"


아이의 마음이 꼭 몸과 비례해 자라는 것 같진 않다.


"글쎄. 엄마는 왜 맨날 집에 있는 거 같아?"


"엄마니까."


"너는?"


"나는..."


엄마가 누운 아들의 옆에 나란히 대자로 자리를 잡아 눕는다.


"시원하다고 생각하니, 시원한 것도 같으네."


"나는 학교에서 배울 게 없는 것 같아."


"그럼 이제 직장만 잡으면 되겠네."


"임대가 뭐야?"


"잠깐 빌리는 거"


"잠깐 빌려사는 게 부끄러운 거야?"


"그렇게 생각해?"


"아니."


"응."


"나는 왜 아빠가 없어?"


"아빠가 없으면 너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어."


"눈앞에 없잖아."


"24시간 아이들 눈앞에 서 있는 아빠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24시간이 아니라 더 시간이 지나도 아빠는 없잖아."


"그런걸, '지금은' 없다고 말하는 거야."


"서점에서 책을 훔쳤어."


"응."


"돈이 없어서. 잠깐만 보고 갖다 주려고 했는데."


"응."


"서점아줌마가 다신 그러지 말라고 용서해 준다고 했는데."


"흥미진진하네 아들."


"아줌마 아들이 우리 반이었나 봐."


"음."


"나한테 도둑놈이라고 말했어."


"훔친 건 잘한 거야?"


"엄마가 훔쳐서라도 봐도 좋은 게 책이라고 했잖아."


"엄마가 잘못했네."


"그 뒤로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어."


"애들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건가?"


"어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옆반 덩치 큰 애가 점심시간에 따라오라고 했어."


"무서웠겠는데."


"... 가보니까 우리 반 애들, 그리고 다른 반 애들도 몇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17대 1로 싸운 거야?"


"난. 그냥 가만히 있었어. 자꾸 나보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 방법을 선택했구나."


"나는 걔네들한테 잘못한 건 없어."


"응."


"그래서 상상의 인간을 만들어냈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친구가 내가 위험에 처한 걸 알고 달려와서 대신 싸워주는 거야."


"우와. 그 상상 멋진데?"


"그런데 사실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무도 날 위해 나서지 않았어."


"마음에 큰 용기가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은 것 같지?"


"반에 돌아가서도. 아무도 나와 친구하고 싶어 하지 않아. 그건. 여기로 이사온 후 부터 쭉 그랬어."


"그랬구나."


"나는. 학교 다닐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배우고 싶은 게 없어."


"어떻게 하고 싶어?"


"안 다닐래요."


"넌 혼자인데. 아무도 너에게 다가오지 않는 게 슬퍼?"


"나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으면, 그게 제일 멋진 사람이겠구나. 누군가에겐 초인적인 사람이 되어주는?"


"그만두게 해 주세요."


"한달만 더 생각해보고,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렇게 하자."


"나 별로지, 엄마."


"이렇게 엄마한테 말 해준다는 거 자체가 우리 아들 대단한거야. 말로 꺼낼 수 있다는 게. 상처를 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스스로 치유할 줄도 알구. 대견해."


"...고마워."


둘은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천장만 보고 누워 눈만 깜박였다.


눈물이 고여있지 않고 잘 흘러내릴 수 있도록.


꼭 한달이 지나고. 엄마와 아이는 함께 학교로 찾아가 자퇴서를 제출했다.

손을 단단히 잡고 걷는 두사람의 머리 위로 햇살이 빛을 내려주는 겨울이었다.


동네에 다다르자 엄마는 아이에게 잠깐 집 앞 놀이터에서 기다리라 말하며 서점으로 향했다.


아이는 벤치에 앉아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자신보다 두세살은 어린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데.

날이 찬데도 겉옷을 입고 있지 않다.


아이는 천천히 일어나 여자아이에게 다가가서 바로 옆의 비어있는 그네에 조용히 앉았다.


"나랑 누가 모래 더 높이 쌓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여자아이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안경 낀 남자아이를 바라본다.


"너는 손이 작아서 나보다는 훨씬 느리겠네."


"너 누구야?"


"나? 김시준. 너는?"


아이는 뿔테 안경을 콧등위로 올리며 말했다.


"... 고우리."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검정테 너머의 눈을 바라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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