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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니오. 왜.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눈을 뜬다


오늘도 눈을 뜨고 싶을 때까지 최대한 기다렸다가,

눈을 뜬다.


눈을 뜨고서도 몸을 일으키는 것은 한참이 걸릴 것이다.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데 굳이.

기어코 찾아오고야 마는.

시간.


그것을 향한 나의 최대한의 반항.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은. 실행하고야 말 것이다.


어린 시절엔 바보라 불렸다.

청년이 되니 백수라고도 불렸다.

나이가 더 드니, 아무도 나를 무엇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그런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다.

나는 스스로 마감할 것이다.

이 피곤한 여행을.


만남은 없이

헤어짐만 있었던 여정을.


이제. 뭐부터 해야 하지.


똑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아씨. 또 그놈. 아니 그 녀석이다.


며칠 전, 집 안에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기 위해 잠시 열어두었던 문 사이로,

몸집도 쬐매 난 여자아이 하나가 들어와서는 현관에 쌓아둔 책 몇 권을 꺼내 한참을 읽더니 어느 순간 인사도 없이 돌아갔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아주 이제 출근을 하는 구만. 오늘은 겁 좀 줘야겠다. 놀라 자빠지면 어쩌지? 너무 놀라진 말아라.


주섬 주섬 낱말카드를 찾아든다.


-세장이면 충분하겠지.


네, 아니요, 왜요 라고 쓰여있는 낱말 카드.


나는 말을 하지 못한다.



찾아온 아이


"어? 오늘은 있네"


방문을 열고 나온, 며칠째 씻지도 않아 꾀죄죄할 나를 보고 아이가 던진 첫마디였다.


"아. 계시네요. 미안요."


말을 고친다.

이미 엎질러졌다.


낱말카드를 들어 보인다.


-왜


뒤의 '요' 자는 검지손가락으로 가린 채.


"아저씨는 왜 커튼도 안쳐요? 너무 어두워요

그래서 제가 현관문을 더 활짝 열었어요. 괜찮죠?"


-왜


"책 보러요. 저희 집에 없는 게 여긴 많아요... 사실은 우리 집엔 한 권뿐이지만."


-왜


'가'라는 단어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후회된다.

다시 가지러 들어갈까?


"책이 없어도 상상하면 된다고 그랬어."


내가 '요' 를 가리니 지도 '요'를 떼네.

대꾸를 안 하면 알아서 나가겠지.


그런데 아이는 현관 앞에 앉은 채로 이제 신발까지 벗는다.


"그래서 아저씨. 나, 내가 만든 동화이야기 들려줄게."


모르겠다.

쭈그려 있던 다리를 펴고 나도 바닥에 털썩 앉아버린다.


"옛날에 굴러가는 돌이 있었어. 그 돌은 하루 종일 구르는 게 일인 아이야. 친구들은 가끔 사람들 손에서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고, 금이 되기도 하는데 이 돌은 아무도 주울 생각을 안 했어. 그래서 돌이 슬펐어."


중간에 끊는다.

밀당 좀 아는구나.


"계속해도 돼?"


대답은 하지 않고 꼬마의 눈을 쳐다본다.


무섭지 않니 꼬마야?


"돌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힘이 빠졌어. 살아가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어느 날 절벽에 핀 한 꽃 옆에 도착했어. 꽃이 말했어. 넌 열심히 구르는 돌이구나. 멋지다. 돌이 얘기했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자 꽃이 슬퍼서 고개를 숙였어. 어디까지 내 고통을 말해야 나도 그 괴로움을 이해한다고 생각할까? 하고 말이야."


너는.

지금

몇 번째 살고 있는 거니.


일곱 살이 아니고 일흔인데.

내가 헛것을 보나.


"돌은 꽃을 지나쳐서 큰 길가로 굴러갔어. 더 이상 구르는 것도 피곤하고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거든. 그렇게 구르다가 결국 화물차가 밟고 지나갔어. 구르는 돌은 바스러졌어."


욱씬-


아이는 본인이 말을 하면서도 눈물이 그렁하다.


-왜


"그래가지구. 무슨 일이 생겼냐면.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어. 구르는 돌의 엄마바위는 가슴이 뻥 뚫렸고, 아빠인 산은 폭포를 쏟아내며 울었어. 절벽의 꽃은 슬퍼서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는 꽃이 되었어. 구르는 돌이 없어진 세상 속 모두가 슬퍼했어. 돌은. 몰랐을 거야. 어떡해. 너무 슬퍼 아저씨."


징-


낯설다.

잊고 살았던.

이 감정 이름이 뭐더라.


"안 슬퍼?"


-왜


"그냥 아저씨 집에 올 때마다 방에서 누워있는 아저씨를 보고 내가 상상한 이야기야. 나는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이 될거야. 그 첫 시험이야. 아저씨가."


나는.

곧 떠날 텐데.

책은.

모두 남겨놓고 가야겠다.



우리 봄날


"아저씨, 나 내일 또 올게. 이제 엄마 올 때 다됐어."


아저씨는 멍하니 있다가 급하게 카드를 찾는다.

'아니'라고 쓰여있는 카드를.


"응! 내일 봐 아저씨. 그리고 냄새나니까 청소 좀 하고."


난 놀라서 카드를 뒤집어 본다.

왜 니가 나와


'네' 카드가.


아이는 다시 신발을 주워신고 일어나 아저씨를 쳐다본다.


"그런데. 아저씨 이름은 뭐야?"


통성명 까진 하지 말자.


" 내 이름은 우리야. 고우리. 나 말고 우리로 살라고 그렇게 지었대."


"..."


"아저씨 이름은. 음... 봄날이야. 이제 봄날이라고 부를게."


-왜


"왜?? 아저씨. 모든 일에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니야."


끄응-


"그래서 나랑 아저씨랑 같이 있으면, '우리 봄날' 이야. 와, 이쁘다!"


하...


아이는, 아니 우리는 그렇게 손을 흔들고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 달려가버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기만 하던 아저씨, 아니 봄날은 천히 일어나서 문 쪽의 쓰레기통을 집어든다.


소주병도 치우고.

청소를 해야겠다.


내일은.

냄새가 나지 않게.


커튼을 확-

밀쳐 연다.


우리 봄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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