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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믿어요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엄마의 외출


좋아하는 오리인형을 안고 막 잠이 들려는 환이를 바라보며, 엄마는 오늘도 조용히 동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그러자, 스르르 눈을 감았던 환이가 다시 눈을 번쩍 뜨더니 한 손을 마구 휘젓는다.

동그란 눈 안에 슬픔이 언뜻 비치는 것이,


"아이구, 너도 슬픈 걸 알아? 후후"


환이가 매번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재미있어, 처음엔 늘 섬집아기로 시작을 한다.

그러다 다시 눈을 감고 싶어 하는 환이를 보며 엄마는 이번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반달을 부른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이번에는 옆으로 누운 얼굴에 혼자 손까지 받히며 스르르 다시 눈을 감는다.


"어, 거기 고씨 있어?"


문 밖에서 장씨 할매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네 들어오세요."

"응, 이제 어여 가봐야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환이 옆으로 다가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매가 말한다.


"네.. 몇 시간만 좀 부탁드려요."


"어휴, 걱정 하들말어. 내 손주다 생각하고 볼테니께이."


한 달 전, 타지로 물건을 팔러 나간 환이아빠가 돌아올 날이 아직 열흘이나 남았다.

그 사이 어떻게든 입에 풀칠을 해보겠다고, 이 집 저 집을 돌며 바느질감을 얻으러 다니는 것도 족히 세 시간.

환이의 낮잠시간은 길어야 고작 두 시간인데...


"애가... 말을 못 해서 많이 불편하시죠?"


"아이, 뭐시그래. 암시도 안 해. 난 그냥 옆에만 있으면 아가가 혼자 을매나 잘 노는데."


"네... 감사합니다."


해를 넘기면 이제 곧 네 살이 되는 환이지만, 아직 아빠나 어어어 말고는 할 줄 아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혹시나. 잊어버리면 찾을 길이 없다.


그 생각까지 미치면, 가슴이 다 타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아이 입에 넣어줄 죽에 고기가루라도 넣으려면.

일을 나가야 한다.


"그럼, 죄송해요. 좀 부탁드려요."


할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그래도, 부탁할 분이 있어 감사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입술을 꾹 물고, 다시 한번 발을 뗀다.


늘 같은 날인데도.

늘 어렵다.



한낮의 아이


몸집이 다 자라지 않은, 아직은 나이 어린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이 시간이면 다들 일하러 나가고 빈집이 많을 테지.


아빠가 일러준 대로, 비어있는 집을 찾아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먹을 것이 있으면 들고 나온다.

계획은 간단했다.


그렇게 첫 번째로 들른 집이,

환이네였다.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부엌의 위치를 찾아본다.

그때, 문이 쾅 열리며 아이 하나가 뛰어나온다.

그 뒤로 할매 하나가 바닥에 누워 작은 소리로 코까지 골며 잠들어있다.


'아 심심해, 심심해 뭐 하고 놀지?'


아이의 입은 워워, 어어 하는 소리를 내고 있지만, 호랑이에게는 아이의 말 뜻이 단숨에 전해진다.

동물의 언어처럼.


놀라서 잠깐 얼음이 되었던 호랑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밝힌다.


'호랑이!'


'그래, 호랑이다.'

-왜 대답하고 있지?


'나도 태워줘!'


-끄응.


호랑이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문패를 다시 확인한다.


-아, 이 집에 그 음식솜씨 좋다는 고씨 아지메가 사는 집이구만. 먹을 거 대신에 아지메를 잡아가면 한 달은 먹을 걱정은 없겠지?


'꼬마, 넌 이름이 뭐야?'

'넌 이름이 뭔데?'

'나는.'


-이름이 있던가?


말리면 안 돼.

고개를 흔든다.


'질문은 그만하고, 너의 소원을 하나 나에게 말해봐. 아마 내가 이뤄줄 수 있을 거야'


'정말로?'


순간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아빠가 보고 싶어! 아빠를 데려와줘!'

아빠, 아빠, 아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한다.


'좋아. 내가 네 아빠를 찾아다 줄게. 대신에 너에게 제일 소중 한 것을 나에게 빌려줘야 돼. 괜찮지?'


'소중한 것? 좋아.'


-크크, 인간들은 참 쉽다니까.


호랑이는 방으로 들어가 사진 속 환이아빠의 얼굴을 확인한 후 잽싸게 뒤돌아 달려간다.



돌아온 엄마


한 자루 가득 옷감을 채워 넣어 그 무게가 상당하다.

등에도 매었다가, 다시 질질 끌었다가.

하지만 집이 가까워 올 수록 오히려 힘은 더 솟아나서, 엄마는 거의 날다시피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환아!"

외침이 먼저다.


문이 열리고, 장씨 할매가 두 발 위에 환이를 얹은 채 엄마를 쳐다본다.


"아이고, 누가 보믄 머 삼일 낮밤을 못 만나다 만난 사인 줄 알겄네"


"워워. 어어어어.! 어어!"

환이 엄마를 보고 신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얼른 다가가서 꼬옥 가슴에 안아본다.


"아, 헤헤. 감사해요 할머님. 많이 힘드셨죠?"


"감사 헐게 머 있나. 요로코롬 시끄럽지도 않고 차분히 앉아 노는 아를. 나는 기양 보고만 있기만 하면 되는데"


"감사합니다. 할머님."


"그려, 난 이제 가보끄망."


저린 다리를 하나, 그리고 하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을 나가려다 뒤돌아 한 마디를 붙인다.


"내일도 또 올테니께. 넘 걱정 하들 말고."


할매가 돌아가고.

엄마는 아이와 못 놀아준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아이 옆에만 붙어 함께 놀이를 한다.

뉘엿뉘엿 해가 다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엄마는 가져온 옷감을 자루에서 풀어낸다.


"자, 이제 엄마도 일을 좀 해볼까아?"


엄마는 환이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는다.


"어어어, 워워"


아직 치우지 못한 밥상 위 수저를 가지고 상과 바닥을 치며 장난을 치는 환이.

삼분의 일쯤이나 마무리 했을까, 엄마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깜박 잠이 들어버린다.


그때였다.


툭,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어? 우리 집? 환아! 여보!"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자 환은 아직 잠들어 있는 엄마를 한번 쳐다본 후, 벌떡 일어나 방 문 앞으로 나간다.


"아빠, 아빠, 아빠"


기계음처럼 반복되는 소리를 내며 환이는 날아가 아빠에게 안긴다.


"어이구, 우리 환이. 잘 있었어?"


환이는 아빠를 꼬옥 껴안는다.

그 뒤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담벼락에 몸을 가린 채 환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환이 잠이 들고 난 후,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아빠는 그동안의 일들과 서로의 수고를 들어준다.


"고생 많이 했지?"


"아니에요. 환이가 힘들지. 말도 못 하는 어린 게. 얼마나 아빠가 보고 싶고. 또 답답할까."


"우리 환이. 건강히 잘 크고 있잖아.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엄마와 아빠는 잠들어있는 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염려와 사랑을 쏟아낸다.



가장 소중 한 것.


같은 시각,


호랑이 한 마리가 터덜터덜 다시 산 길을 오르고 있다.


"어, 어? 저거 호랑이 아니야? 숨어, 일단 숨으라고"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올랐던 김씨와 임씨가 다급히 바위 뒤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지나가는 호랑이를 숨죽여 지켜보다가 말을 한다.


"저거, 또 어린애 한 명 물고 가는 거 아냐?"

"아니, 어린애 라기엔 조금 작은 거 같은데? 누구 집, 어린 아기가 있었나?"


그때, 가려져 있던 달빛이 드러나며 호랑이의 몸을 온전히 비춘다.


"어, 저거, 저거 고씨 아짐네 아들,"


"어어, 없으면 못 잔다고 늘 품에 안고 있던 그, 오리인형 아니야?"


엄마의 품에 안겨 깊은 잠이 든 환이는 꿈속에 크레파스 병정들과 뛰어다니는 꿈을 꾼다.

싱글싱글 웃다, 말다 하던 아이의 입에서 잠꼬대가 새어 나온다.


"어어어, 어어"

'엄마, 나만 믿어요.'


터덜 터덜 걸어가는 호랑이는.


화가 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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