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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속도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늦은 출발 인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이미 출발한 상태라 가장 힘이 딸려 보이는 나귀 하나 남아있을 뿐이었다.


"잘.. 부탁해."


이 노쇠에게라도 의지해서 도착점까지 가봐야겠다. 꼬마는 나귀의 끄덕거림을 수락으로 알아듣고 등으로 올라탄다.


마음은 급한데 나귀의 발걸음은 한없이 느리만 하다.


"조금만 빨리 가면 안 돼? 다른 애들은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가는데."


옆을 돌아보니 다른 아이들은 발 빠른 말 위에 앉아 그마저도 엉덩이를 쳐대며 속도를 높이고 있다.


나귀는 꼬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머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에 한참 정신이 팔려있다.

그런 나귀의 눈을 따라 꼬마도 나비를 한참 쳐다본다.


"하얗고 예뻐."


"저건 배추흰나비야. 꽃가루를 옮기는 중이래."


"그럼 꽃들도 있겠네."


"응, 꽃밭에서 쉬었다 갈까?"


꼬마는 꽃밭에서 나귀에 기대 누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쉬어가니 하늘의 색도 찾아낸다.


"높아. 파래."


눈에 띄는 커다란 배춧잎 하나를 고사리 손으로 꺾어 나귀에게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가려준다.


꿀벌하나 위이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꼬마는 벌떡 일어나 하려는데 처에서 더욱 소란한 싸움이 났다.


말에서 내린 아이 둘이 무엇 때문인지 주먹다툼이다.


"싸우나 봐, 나 가까이 가볼래"


미동 없는 나귀를 쉬게 두고 꼬마는 한창 주먹다짐인 자리 한가운데로 달려간다.


"네가 앞서 달리다가 흙탕물을 튀긴 거라고."


"네가 늦게 달리니까 흙탕물을 맞은 거지."


꼬마는 가가서 '왜들 그래' 하고 끼어든다.


잠시 후 터벅터벅 나귀에게 돌아가는 꼬마의 발걸음이 힘이 없다.


"나 맞았어"


볼이 얼얼하다.


다시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선다.


나무판자를 잔뜩 싣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아저씨가 보인다.


"도와줄까?"


"너 하고 싶은 대로."


"아저씨, 제가 좀 실어드릴게요"


꼬마는 판자 일부를 받아 나귀의 등에 얹는다.


"아구 꼬마가 힘이 장사네. 고맙다 아가."


나귀의 발걸음은 더욱 느려졌지만 얼굴엔 피곤함보다 미소가 가득하다. 어린 꼬마의 것과 마찬가지로.


우르릉-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투둑투둑-


꼬마는 조금 전에 받았던 나무판자로 나귀의 머리를 가려준다.


"나는 괜찮으니 네가 젖지 않게 조심해."


"나도 괜찮아."


우산을 쓰고 지나쳐가던 다른 아이들이 이유도 없이 나의 나귀에게 짱돌을 던져댄다.


"너는 뭔데 그렇게 느린 거야, 이거나 받아라."


꼬마는 입술을 꽉 물고 나무판자로 짱돌을 막아낸다.

나귀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간다.


말도 없이 뒤뚱뒤뚱 펭귄의 걸음 모양으로 걸어가는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꼬마야, 너도 탈래?"


여자아이는 사탕을 입에 문 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도 돼?"


꼬마의 등 뒤로 딱 붙어 앉아 허리를 꼬옥 붙드는 손이 앙증맞다.


"너는 왜 혼자 걷고 있는 거야?"


"사탕 먹다가 엄마 손을 놓쳤어... 찾을라고."


꼬마는 아이의 손에 아까 뜯었던 꽃과 배춧잎을 쥐어준다.


"이걸로 놀고 있어"


그리고선 씩씩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꼬마차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꼬마차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랄랄랄라 랄랄랄라"


여자아이도 즐거운 지 함께 흥얼거린다.

구름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지?"


그러고 보니, 어느 지점부터는 이미 종착지 깃발을 든 채 쉬고 있는 아이들을 한 둘 씩 지나쳐온 것 같다.


"어? 끝이 다 다른가?"


"시작이 다르니, 끝도 다르지 오빠."


여자아이가 말한다.


"너의 길은 네가 완주한 거야. 느린 것도 빠른 것도 없어."


환이는 빙그레 웃으며 나귀에서 내린다.


"이제 이거는 네가 타고 가면 되겠다. 너도 잘 도착해야 해."


"응 오빠."


환이는 다시 길을 걸어 나가는 나귀와 여자아이를 향해 크게 외친다.


"고마웠어!"


씩씩하게 손을 흔든다.


'나도 다른 말들처럼 인간의 언어를 할 수 있었으면 너를 더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환아.'


나귀는 속으로 미안함을 전하며 다시 천천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환이는 받아 든 종착지 깃발을 흔들며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본다.


"어마!"


엄마는 환이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다가 자신을 찾는 아이의 잠꼬대를 듣는다.


낮에 건넛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는 길에,


"아이고, 이렇게 컸는데 아직도 말을 못 해서 어쩌누. 엄마가 많이 답답하겄어."


말은 못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닌 환이는 집 안에 들어와서야 눈물을 글썽었다.


"환아, 꿈속에서라도 좋은 친구들 만나서 재미있는 여행 많이 하고 놀아라."


엄마는 솜털이 보송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꿈속에서

자란다.


꿈에서도

잘한다.


자란다.

잘한다.

자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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