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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의 생

쉬어가는 이야기, 짧은 동화.

by 아는개산책

'우리 엄마는 왜 말을 못 할까'


남들은 이런 생각 같은 거 안 해도 잘만 사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7살짜리 환의 고민은 심각하기만 하다.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듣고 싶은 말은 더 많다고!


하지만 막상 환의 발소리를 듣고 먼저 문을 열어 맞이하는 엄마의 미소를 보자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엄마! 나 오늘 백점 맞았어! 기뻐?"


가방에 넣지도 않고 손에 들고 온 시험지를 펄럭거린다.


끄덕끄덕

엄마가 배시시 웃는다.


"진짜 진짜 좋은 거지? 진짜 좋으면 사랑한다고 말해줘"


엄마는 금세 다시 슬픈 눈이 되어 환을 본다.


"엄마는 왜 남들처럼 사랑한단 말도 못 하는 거야! 엄마 미워!"


환은 그대로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말도 못 하는 엄마랑 어떻게 살아. 슬퍼서 어떻게 살아."


아직 꼬마인 환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방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는 가슴을 움켜쥔다.


-엄마가. 많이 미안해. 미안해 아가.


어느새 잠이 든 환이 깰세라 엄마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말라붙은 눈물을 닦아낸다.


"화 아 나 ㅅ 다 다 해해"


"응? 뭐라고? 여기가 어디야?"


잠이 깬 환은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항상 한 자리에 서서 나를 보고 있어야 할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먼발치서 천천히 다가오는 두 그림자.

환은 당연히 그들을 본 적이 없지만, 느껴진다.

그들의 이름은 유 그리고 무 라는 것을.


"아저씨, 저희 엄마 못 봤어요?"


유는 따뜻한 표정으로, 무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손을 턱에 가져간다.


"네가 환이구나. 듣던 대로 귀엽네"


"뭐예요. 울 엄마 어디 있어요?"


"엄마 잠깐 장 보러 갔어. 아저씨랑 조금만 같이 기다릴까?"


"나한테 말도 없이?"


"엄마 원래 말 못 하잖아."


"말 못 한다고 소통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엄마는 항상 나한테 얘기하고 움직인다고."


"흐응. 그렇지."


엄마가 환을 혼자 두고 자리를 비웠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이런 일은 처음이야.


"환이는 엄마가 말을 안 해줘서 슬퍼? 그래서 운 거야?"


유가 묻는다.


"응. 엄마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왜 그렇게 생각해?"


"말을 할 수 있으면 엄마 생각을 더 잘 알 수도 있고.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들을 수 있어."


"엄마 생각이 알고 싶었어, 우리 꼬마가?"

이번엔 무가 말한다.


끄덕끄덕. 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말로 하지 않아도 환이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형아가 알게 해 줄까?"


"형?"


"응. 형이라고 해줘."


끄덕끄덕.


키득키득 무는 웃으며 가져온 시계를 앞에 쿵 내려놓는다.


"이게 뭐야?"


무는 잠시 표정이 바뀌더니, 입가에 지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가는 시계.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천천히. 조금씩 빠르게. 매우 빠르게 돌아간다.


"어? 어? 형아"


되돌아가는 시계만큼 줄어드는 환의 키.

변하는 얼굴, 손, 발,

어느새 그는 탯줄을 손에 쥔 태아의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어린 모습이 온 데 간데 사라진 성인의 모습으로 유와 무 앞에 선 그.


"어? 뭐지? 뭐야 아저씨들?"

환이 날카롭게 말한다.


유 와 무는 다른 말 없이 저너머 어딘가로 시선을 보낸다.


"저기 뭐가 있어?"


한눈에 들지도 못할 만큼의 거리에서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귓가에 전해진다.


"... 주세요, 해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가 대신 아프게 해 주세요. 이 아이의 목소리를 뺏으면 안 돼요. 제가 대신 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 이 아이는 온전히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게 도와주세요. 제게 남은 모든 것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제발... 이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엄마다.

엄마였다.

엄마가.

주었다.


그리고 좀 더 또렷이 들리는,

너무나 듣고 싶던 그 목소리.


"환아 사랑해."


환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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