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회관
한 박스밖에 되지 않은 짐을 푸는 일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창문 앞의 노란 커튼을 젖히자 곰팡이 냄새 비슷한 것이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곧 그 향내를 잊게 할 만한 푸른 잔디밭을 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시각이 후각을 이겼다.
이제 이곳에서 좋든 싫든 4년을 버틴다. 나는 비싼 돈을 들여야 하는 자취방보다도 잠시 쉬어가는 공간처럼 생긴 기숙사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억, 추워"
회색 후드티를 면티 위에 겹쳐 입고서야 다시 정문을 나선다.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끌고.
그래도 '봄'인데.
목적 없이 걷다 보니 오래된 시멘트 벽에 녹색의 덩굴이 군데군데 감겨있는 커다란 회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 은행이 있다던가.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고 더욱이 아직 개강도 하기 전이다.
1층이 2층같이 높은 대지에 위치해 있는 건물이었다.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밟고 지나갔을 돌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어둑한 복도가 길게 늘어서 있는 한편, 나무로 된 문이 활짝 열린 채 햇살이 복도까지 쏟아지고 있는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혼잣말을 했다.
'오, 정말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는데 왜 문이 열려있을까. 를 생각할 수 있으면 새내기가 아니다.
꽤 넓은 평수가 마치 사무실 같기도 하고. 또 막상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가구가 없기도 하다. 고작 양철책상 너덧 개와 어디서 주워온 것 같은 낡은 가죽소파가 덩그러니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크게 한 번 훑어보는데 한쪽 벽에 뒤통수가 불룩 나온 컴퓨터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어, 컴퓨터"
아직 집에서 컴퓨터를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막상 할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뭔가를 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서울이니까. 서울에선 컴퓨터로 뭘 할까.
컴퓨터 앞에 서서 마우스를 흔들자 누군가 꺼놓지 않은 화면 하나가 그대로 나타났다. 한창 유행하고 있다는 카이러브 채팅사이트였다.
"오!"
고등학생 때 집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전화선을 이용해야 했다. 외출 중이던 엄마가 집에 전화했을 때 통화 중이라고 뜨기라도 하면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그렇게 잡도리를 당하곤 했다. 너 전화기로 채팅하면 통신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엄마, 나 아니야. 아니라구.
나는 잠시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기척을 확인했다. 먼발치의 발자국 하나 들려오지 않는 조용한 오전이었다.
다시 모니터 앞으로 갔다.
채팅창의 주인공은 로그아웃이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키보드 자판을 눌렀다.
-안녕.
침입자
짤막하게 끊기는 채팅을 시작하면서 자꾸만 문쪽을 돌아보는 게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해법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
나는 문을 잠갔다.
본격적인 채팅을 시작했다.
얼굴이 발그스레 달아올랐다.
한쪽으로 꼬아 올린 다리를 달달거리다 창쪽을 쳐다봤다. 한 벽엔 커다란 두 개의 창문이 있었지만 일층이라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사람머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어서 이 큰 공간에 달랑 하나 있는 문을 쳐다봤다. 문 옆은 모두 벽이다. 문 위로 사람키보다 일미터는 높은 곳에 얇은 창문이 길게 달려있었다.
나를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템을 주워 먹은 게임 캐릭터처럼 도파민이 채워지고 있다. 지금 내 상태가 그렇다. 아무 간섭도 없이 인터넷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소리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덜컹.
"어? 뭐야?"
키보드를 누르던 손은 그대로 정지했고 모니터를 보던 동공마저 얼어붙었다.
"어? 닫혔나? 잠겼나? 뭐야? 왜 이래?"
덜컹덜컹
모니터를 껐다.
누군가 문고리를 잡고 흔들고 있다.
남자였다.
고등학생 때까지 듣던 남자사람 친구의 것과는 다른, 진짜 '남자'같은 목소리였다.
"누구 있나? 거기, 누구 있어요? 씁, 아닌데."
똑, 똑, 똑똑 똑똑
노크소리가 급하게 연달아 울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벽 밖으로 옷 스치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리퍼 위에 발마저 세로로 세워 발가락만 짚은 채로 뒤꿈치는 아래로 내리지도 못하고 멈춰있다.
-어떡하지. 어떡해. 가라. 그냥 가라.
손톱을 씹으며 주문을 외웠다.
가세요. 가세요. 서로의 건강을 위해.
잠시 후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점프를 하기 시작했다. 발돋움을 하고 힘껏 뛰는 소리가 들렸다.
"어?" 훕 "어?" 헙 "보인다" 헙 "보인다!" 헙 "너!" 헙 "긴 머리!" 으햡 "뭐야?"
발로 바닥을 딛고 뛰어오를 때마다 한 마디씩.
아. 꿈인가.
긴머리를 앞으로 내려트려 귀신인 척할까? 너무 아침이었다. 책상 밑에 숨을까? 책상은 오히려 그가 뛰어 보는 그 창문에서 너무 잘 보이는 위치에 있다.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망한 사람 같다.
-그래도 저 벽을 타고 오를수는 없지. 높이가 얼만데. 못 와.
일단 벽 쪽으로 달려가 붙었다. 더 이상 내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하도록.
"너 뭐야? 내가 다 봤어! 도둑이야? 문 열어!"
"아닌데요!"
미친.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더 이상 점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야! 문 열어!"
'아, 제발 그냥 가세요.'
저렇게 시도만 하다 지쳐서 그냥 가길 바랐다. 죽어도 내 손으로 지옥문을 열 순 없어.
다시 한번 흡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의 위 끝에 달린 창문이 쾅하고 열렸다.
"아싸, 열었다. 너 이씨 딱 있어. 죽었어."
이 높이를 뛰어 들어올 수 있으면 학생이 아니다. 아니, 체육전공자인가? 높이뛰기 선수?
이번엔 벽을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번. 그리고 자주. 그렇게 점점 빨라지더니.
창 틀에 그의 상반신이 걸쳐졌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더니 두 팔로 창틀을 짚고 몸을 세워 뛰어내렸다.
착지가 되는 거야?
나는 급히 모자를 뒤집어쓰고 코까지 가려지게 움켜쥐었다.
"너 이씨, 디졌어."
기절할까.
그는 홍콩배우 같은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더니 곧 주먹을 들어 손가락 꺾기를 한다.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도...
도망쳐.
"너. 누구야"
내 안의 본능이 덜덜 떨며 외치고 있었다.
개망신당하기 전에 도망쳐!
그런데
발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