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집착녀

by 아는개산책


첫 술


"너 술 잘 마셔?"

"술?"


보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건들지 못한 분야 중의 하나.

술.


대학은 술이고

술은 대학이다.


그녀는 학과 임원들이 불렀다는 술자리에 나를 동석시켰다. '몇 명 있다던데' 하던 말과는 달리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들이 긴 책상을 두르고 앉은, 인생 첫 술자리였다.


처음으로 자세히 보는 녹색의 술병. 그리고 그 옆엔 빨간 액체가 담긴 투명 유리병.


"이거 딸기소주인데, 먹어볼래? 맛있어."

조심스레 한 잔을 받았다.


-한 번에 다 마시는 건가?


잔이 올라가자 저절로 눈이 감긴다. 달달한 딸기향이 혀끝을 타고 부드럽게 맴돈다. 꿀꺽하는 순간에는 짧은 쓴맛이 느껴진다.


-뭐야. 너무 맛있어!


나는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셀프로.


요상하게

기분이 들뜨고.

막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의자에 올라가 어깨춤을 추고 노래라도 부를까.


하지만 몸은 마음 같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넌 어디서 왔어?"

검정뿔테에 선한 눈매를 가진 선배 하나가 드디어 질문을 했다.


"아... 기숙아요."

평소처럼 말하는데 어찌 시옷이 새는 것 같이 들린다.


"아니, 집 말이야. 사는 집."

"집?"


-우리 집은 왜?


고개를 갸우뚱하다 막 왁자지껄 웃음이 터진 곳을 바라봤다.


"'오빠' 해봐. 해봐아"

"까르르. 오빠! 아이 뭔데요. 저한테 왜 그러는데요."

새하얀 피부에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아이는 서울말과 사투리를 적절히 섞고 있었다. 갈매기 날갯짓처럼 가느다랗게 정리된 눈썹은 그녀가 눈웃음을 지을 때마다 활처럼 휘어졌다. 선배들은 그런 그녀에게 자꾸 사투리를 더 해보라고 시키는 중이다.


눈꺼풀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맞은 편의 테이블을 보았다. 자리자리마다 맥이는 선배와 마시는 새내기 간의 질의응답이 한창이었다.


"논현이요."

"저희 집은 역삼."

"금호요."

"사당인데요."


그런데

저 대답들은,

다 뭐지?


"학교에서 가까워?"

뿔테안경이 다시 물었다. 나의 시선이 다시 선배에게 옮겨왔다.


"아, 저요? 저희 집... 먼데..."


왜 묻는 거지.

천장이 빙빙 돈다.

누가 머리를 잡고 흔드나.


"선배님, 저도 한 잔 주세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애가 유리잔을 내밀며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래야 내 몸도 덜 흔들릴 것 같았다.


"우리 같이 마실까? 선배님, 제 이름 기억하시죠?"

말투처럼 미소도 시원했다.

연예인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이 궁금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왜 아무도 묻지 않는 거지?



망각하지 못한 동물


번쩍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천장에 연두색 야광 스티커가 붙어있다.

낯설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 깼어?"

뒤를 돌아보니 어제의 마지막 기억 속 여자아이가 책상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어? 너... 아. 나 왜 여기서 잤어?"


"어? 어. 흐흐흐흐. 물 줄까?"

"아, 미안 미안해. 방에 갔어야 됐는데."

"아니, 괜찮아. 어차피 아직 룸메도 안 들어온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하얀 시트로 덮인 침대 위에 요도 없이 이불만 덮고 잔 모양이었다.

온몸은 고사하고 얼굴에도, 눈 두 덩이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녀의 옆으로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책을 뒤집어 놓고 의자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빙그레 웃는다.


"너 어제 기억나?"

"... 어제?"


플레이를 누르자 영화가 상영됐다.

제목은 내 머릿속엔 지우개 없다.


'선배니 임~ 제 이름은 고우리예요. 높을 고에 우리할 때 우, 우리할 때 리.'

'언닌 서울사람이에요? 저는 고 우리입니다. 고, 우, 리'

'안녕하세요. 사는 데? 고 우리.'

'선배님! 우리야~ 해보세요. 헤헤헤 고. 우. 리. 할아버지가 지었대요.'


술집 테이블에서.

화장실에서.

밖에서 오바이트를 하다가도.


지나가는 선배들을 붙잡고 나는 그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첫 술은 영혼을 잡아갔지만 몸은 그 자리에 남겨 두었다. 머릿속 영화는 점점 선명해졌다. 처음엔 잘 받아주던 선배들의 눈빛이 점점 경악의 눈초리로 바뀌는 찰나를 클로즈업했다.


"너, 이름 정말 좋아하나 봐. 이름 못 불러 죽은 귀신인 줄."


"그거 나 아니야."


-미친 여자지.


어제 입은 옷 그대로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양팔을 번갈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퀴퀴했다.

마치 이곳에서의 내 미래처럼.


아.

냄새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끊겼던 필름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2층에서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엉덩방아를 찧는가 싶더니, 그대로 통통통통

한 계단씩 엉덩이로 내려와 1층까지 도착했다.


"우리야! 괜찮아?"

위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1층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내게로 머물렀다.


낯선 시선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동그란 얼굴의 만성피로가 보이던 얼굴. 홍콩배우를 찾으러 들어왔던 남자. 배가 불룩한...


"토토로."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너?"


저 목소리.


창문남

이었다.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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