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탁탁 탁탁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친다.
흠칫하며 돌아보니 유진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우리, 한참 불렀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가 달려온 길을 쳐다봤다.
"너도 영미시 듣지? 같이 가."
유진이 팔짱을 끼자 그녀의 보폭에 맞춰 내 걸음도 빨라졌다.
"너 오늘도 동연 가?"
"응? 어."
서라 언니의 납치극으로 우린 동아리연합회라는 학생 자치회의 일원이 되었다.
줄여서 동연이라고도 불렀다.
'저희는 뭐 하는데요?'
'그냥, 아무 때나 와서 앉아있으면 돼.'
그날 이후 거의 매일, 매 시간, 수업이 없을 때도 수업이 있을 때도 나는 그곳에 갔다.
"넌 누가 제일 잘생겼어?"
퍼뜩 생각난 듯 유진이 물었다.
"음... 다 비슷비슷한데..."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몇 명을 떠올리다가 답했다.
"동건오빠"
그 선배의 유머가 좋았다.
"에? 안돼. 나이 너무 많아. 여자친구도 있고."
"그래?"
"여친 장난 아니래. 키도 오빠보다 한 뼘은 더 크다던데."
"너 많이 안다."
서라 언니에게 들은 건가.
"생긴 건 도진오빠가 제일 낫지. 넌 별로? 그런데 말하면 좀 깨지?"
유진의 말에 도진을 보며 웃던 언니가 떠올랐다.
-둘 다 서로 웃고 난리 부르스.
"별로."
강의실이 있는 건물 근처에서 반대로 걸어 올라오는 보름과 마주쳤다.
우린 룸메였지만 방에선 거의 보지 못했었다.
"보름아, 어디가."
멍하니 땅만 보며 지나치는 보름의 손을 움켜 잡았다.
유진이 먼저 간다는 눈짓을 한다.
"어? 우리야. 나 버스타러."
"수업 없어?"
"어. 너도 갈래?"
보름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무섭게.
"난 이거 들어야 돼. 너 어디 가는데."
"그래, 그럼 심심하면 연락해. 나 오락실에 있을게."
"오락실? 오.락.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잡아 흔들어댔다.
"남자친구 만나러. 흐흐. 저녁때 봐."
"누가? 남자가?"
오락실에?
보름은 별일이냐는 듯이 살짝 미소 지었다.
"이따 봐."
"어, 그래."
오늘은 일찍 방에 가야겠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와 벌써 남자친구를.
적
"또 왔냐? 넌 수업도 없어?"
나는 대꾸없이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컴퓨터 앞엔 도진이 앉아있었다.
"너 과에서 따야?"
부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여기 다 과랑 안친해. 그래도 동아리는 들어야지, 우리는 관심 있는 데 있어?"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회장인 동건선배가 책상에서 웃고 있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도진만 인사가 없다.
컴퓨터 쪽을 흘끔거렸다.
-대체 뭐 하는데.
그때였다.
활짝 열려있는 문으로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같은 색의 바람막이를 입고 모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성큼성큼 들어왔다.
"어이구, 총여분들이 누추한 데까지 다."
부회장이 반갑게 맞았다.
그중에 서라도 보였다.
"어, 안녕하세요."
나도 소파에서 반쯤 몸을 세웠다.
"왔어?"
서라는 웃으며 인사를 받았지만 이번에도 나를 지나 컴퓨터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동기랬지...
가장 먼저 들어온 호리한 체격의 여자가 말했다.
"뭐 해? 해가 이렇게 좋은데. 놀자."
강단 있는 말투였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겼다.
"뭐 하고"
동건선배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짝축구? 어때?"
"어, 좋은데?"
드디어 도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돌아봤다.
까만 눈동자에 높은 코.
문득 유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일 잘생긴 건...
"어휴, 드디어 다했네! 빡시다. 가자, 짝축구, 인원도 딱 좋네."
도진은 바로 소파로 걸어와 풀썩 앉았다. 엉덩이가 흔들리며 몸이 그에게 기우는 것을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짝 정해."
한 언니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말했다.
"자 그럼 뭘로 정할까?"
하권오빠가 두 손을 비비며 덧붙이자마자 나는 오른손을 반쯤 들었다.
"전, 동건오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나를 쳐다봤다.
기분 탓인지 눈초리가 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아, 이거 아냐?
눈을 깜빡이다 처음 말을 꺼낸 그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피해봐도 따라온다.
서늘하다.
"아아, 누님, 얘 새내기. 이번에 들어왔어. 너는 나랑 해."
여태껏 말 한마디 걸지 않던 도진선배가 불쑥 끼어들더니,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자연스레 내 몸은 앞으로 쏠리며 움츠러들었다.
-내가 왜?
"난 동거ㄴ..."
갑자기 도진의 손바닥이 내 입을 막았다.
동시에 동그랗게 커진 나의 눈은 세 사람을 한 번에 읽었다.
그 언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동건을 쳐다보았다.
동건선배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고만 있다.
그리고 항상 웃는 표정이던 서라 언니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쟤 이름 뭐야?"
언니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질문을 건조하게 던졌다.
-나?
도진의 손바닥 안에서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손에서 좋은 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