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대강의 짝이 맞춰지자, 하나 둘 짝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나도 구겨진 신발을 고쳐 신었다.
"넌 눈치도 없냐."
도진이 두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콩 튕겼다.
이마를 문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왜요."
도진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어느덧 사무실엔 둘 만이 남았다.
도진은 서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앞에 흔들었다.
"우린 이걸로 묶으면 되겠다. 가자."
가까이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언니 누군데요?"
"동건형 여자친구. 오래됐어. 딱 보면 모르냐."
"엥? 여자 친구 있으면 짝하면 안 돼요?"
웃음기 없이 되묻자 그가 눈썹을 올렸다.
"총여 회장 무서운 줄 모르네. 너 연애 안 해봤어?"
연애가 무서운 거야?
"... 가요."
"너 달리기 잘하지."
"이십 초 넘는데요."
"그래? 맨발로도 잘 뛰던데."
"제가요?"
순간적으로 문 옆의 분홍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아직도
WANTED 그림은 그대로였다.
-전혀 안 닮았잖아.
도진의 뒤로 붙어 살짝 몸을 밀었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손수건 끝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요."
잔디밭 위,
나와 도진의 손목도 손수건으로 묶였다.
주변을 훑다가 서라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웃었다. 그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휴. 누가 눈치가 없냐고.
이마를 긁적이며 도진을 쳐다봤다. 나란히 서니 머리가 한참 위에 있는 것 같다.
도진이 한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훑었다.
-악, 언니가 보고 있다고.
"야, 꼬맹이 다치지 말고 따라와. 힘들면 안 뛰어도 돼."
"왜요. 나 이길 건데."
게임은 이기라고 하는 건데.
"그래? 하하 알았어."
삐익- 하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몰라
공이 있는 쪽으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규칙은 어렵지 않지만 나는 마음만 급한 이십 초였다.
한참을 실속 없이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내 맘을 모르기는 공도 마찬가지였다.
"야야, 손목 괜찮아?"
도진이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그제야 내려다봤다.
손목에 붉은 자국.
"오빠가 손수건 꽉 묶었어요."
"네가 그렇게 뛰어다닐 줄 알았냐. 안 힘들어?"
"오빠가 힘들죠?"
도진은 피식 웃으면서 매듭을 메만졌다.
"승부욕 장난 아니네. 쪼고 만 게."
도진의 팔목에 퍼런 힘줄이 올라왔다.
-남자 손.
입술에 닿았었다.
뒷목이 뜨겁다.
-미쳤냐 고우리.
"어어, 거기 공! 공! 도진아 공!"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높이 뜬 공이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뛰어들려 하자 도진이 급하게 손가락을 잡았다.
"어, 몸이 떨어지면 탈락이야."
매듭을 짓지 못한 손수건이 아직 그의 한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의 큰 손에 내 작은 손을 끼어넣었다.
동시에 공이 떨어지고 서라가 돌진해 오는 게 보였다.
"아악, 우리야 비켜, 비켜"
서라와 손이 묶인 하권선배도 속도를 내며 뛰어오고 있었다.
-아씨, 언니가 비켜요.
공 쪽으로 달렸다.
"으아악"
순간이었다.
서라가 헛발질을 하면서 하권선배도 발이 꼬이며 엎어졌다. 그 둘이 고꾸라지자 속력을 멈추지 못한 나도 그녀 위에 넘어졌고 내 팔목을 당기려 한 도진까지 넘어지면서 팔로 땅을 짚었다.
사람들이 뛰어왔다.
발목이 시큰했다.
괜찮아? 괜찮아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진다고 느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라, 괜찮아?"
-김도진.
지금은 내 손목 잡고 있으면서.
"아, 진짜 꼬맹이 이거."
-너는 아저씨고.
보이지않게 입술을 물었다.
도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내 팔도 같이 끌려 올라갔다.
그제야 나는
손을 놓았다.
사람들이 주변을 둥그렇게 에워싸자 햇볕이 가려졌다.
-아씨. 발목...
"어? 피난다."
고개를 들었다.
하권선배가 서라의 팔을 잡고 있었다.
나는 도진의 팔을 쳐다봤다.
내 몸이 눌릴세라 팔로 버티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었다.
"아, 나 발도 삐었나 봐."
서라가 조용히 말했다. 긴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풀어져 있었다.
나도 쭈그린 자세로 발목을 만졌다.
"일단 동연 가자. 거기 약 있을 거야."
동건이 말하자 그의 여자친구가 덧붙였다.
"도진아 너 오토바이 있지? 서라 네가 태워라."
"어? 어, 아 고우리."
나는 대답 없이 빤히 도진을 쳐다봤다.
"쟨 멀쩡하네. 얼른 가."
언니가 재촉했다. 옆에서 동건이 다시 물었다.
"아니, 우리야 넌 안 다쳤어?"
도진이 바지를 털던 손길을 멈췄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부어오른 것 같았다.
"우리야!"
멀리서 이름이 불렸다.
유진이 잔디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낯선 남자 둘도 함께 나를 보고 있다.
-하... 방이나 가자.
나는 유진에게 내쪽으로 와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두 남자도 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