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효능
어쩌다 보니 계속 글 쓰는 삶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내리고, 한숨 한 발 발사하고, 쓰레빠 질질 끌고 에쎄 한 대 꼬나문다. 오늘은 왜 마감일인가, 나는 왜 바지런하지 못한가를 철학적으로 한탄한다. 해답은 뭐고 혜안은 뭘까, 뭘까. 고민하는 날이면 앗 뜨거 검지를 덴다. 그 꼬락서니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메리야스+트렁크 팬티 아저씨에. 내가 실은 지적인 글을 쓰는 고독한 인간이라는 걸, 피력하고 싶다. 글 쓰는 삶이라는 건, 며칠째 면도 안 한 턱주가리도 지적으로 비추는 효능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이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 오늘이 마감일이라 그렇다. 마감일을 수년째 경험해 보지만 한결같이 이모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삶이라는 건 제법 폼 재기 좋은 삶이다. 나는 그래서 글 쓰는 삶이 좋고 그래서 글을 계속 쓴다. 까놓고 말해 간지 나잖아.
글 쓰는 삶이라는 건, 내가 뱉은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녹취되는 삶과 같다. 내가 뱉은 말이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애먼 사람에 화살이 될 수도 있다. 글을 쓴다는 건, 그래서 막중한 책임감을 전제로 한다. 막중한 책임감은 철저한 자기객관화로부터 근거한다. 듣기 좋은 말만 널브러뜨리고, 듣기 좋은 소리만 들을 수도 있지만. 책임감도 솔직함도 없는 글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기객관화가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모진 인간인지를 알아야 애멀지 않은 비판을 할 수 있고, 내가 정말 바른 사람인가라는 의구심이 있어야 양심의 가책 없이 글을 쓸 수 있다. 요컨대 글을 쓴다는 건, 자기객관화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내가 찾은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객관화에 근접하는 것이 사실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럴듯한 단어를 조합해 그럴듯한 문장을 완성하고 문단을 마쳐야 하는데. 내가 그 단어와 문장과 문단 앞에 떳떳한지, 그것들 뒤에 숨어 호박씨나 까는 건 아닌지. 단어 하나 적는 게 어려워진다. 견해를 첨언해야 하는 글일수록, 내가 제법 근사한 사람이라는 걸 피력하고 싶은데. 나는 그러지 못하다는 사실에 타인의 단어와 문장과 문단이 탐스러워진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고, 의자를 바꾸면 허리가 곧추서고, 사무직을 하면 거북목이 된다. 글 쓰는 삶을 계속하다 보면, 탐스러운 단어와 문장과 문단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보다는 바르게 사려 애쓰게 된다. 글 쓰는 삶은 간지 빼면 시체인데, 간지를 챙기기 위해 쓰레기를 바로 버리고, 원색적 비난을 삼가고, 사람들에 조금은 친절해진다. 그러지 않으면 매주 찾아오는 마감일마다 단어 하나 적지 못하고, 초록창을 열어 ‘지구멸망은 언제 하나요’ 따위로 귀결되는 음모론에 내공 100을 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간지가 안 난다.
가끔은 일단 뱉고 본다. 하 씨발 모르겠고, 마감은 다가오는데 뭐 어쩌라고. 글을 싸지른다. 그런 글은 공개될 적에 아무도 보지 말라 간곡하는, 기괴한 바램을 간곡한다. 근데 가끔 그런 글이 잘 팔릴 때가 있다. 그것만큼 곤욕도 없다. 말을 뱉었다는 건,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아 꿀꺽 삼키는 것이 가능한 울트라캡숑 초능력 마블 히어로가 아니라면, 지키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말 한 번 잘못 뱉었다 말대로 살아가게 된다. 라면 끓일 때 스프부터 넣어야 한다 뱉었다면, 면부터 넣는 게 더 맛있는 거라고. 식약청에서 입장문을 발표한다 한들. 스프부터 넣고, 끓이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면부터 넣어버리면, 그런 위선이 어디 있나. 위선을 부리다간 글 쓰는 삶에 시한부 수명이 정해진다.
글 쓰는 삶이라는 건,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인간으로 살게 만든다.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긴장하고 살아간다. 뱉고 싶은 말을 쓰기 위해 조금 더 바르게 살아간다. 음지와 양지 경계에 서있던 때 양지로 움직이게 만든다. 글을 쓰지 않는 나보단, 글을 쓰는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라. 그래서 글 쓰는 삶이 마음에 든다. 매주 찾아오는 마감일이 고역이고, 뱉은 말을 지키자니 피곤하고, 뱉기 위해 귀찮아지는 게 한둘이 아니지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감내할 가치가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원래 몸뚱이는 말따라 움직이는 법이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