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위한 현장실습을 앞뒀던 초겨울의 어느 날, 난 서비스직의 최전방인 카페에 가게 된다.
그것도 이름대면 다 아는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엄청나게 바쁘고, 잡일이 많고, 그만큼 시끄럽고,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허술한 곳.
(출처: unsplash)
첫 실습이 시작되던 날, 나는 최대한 단정한 옷을 입고 말을 아끼기로 했다. 첫 출근은 무조건 30분 일찍 가라던 교수님의 말씀대로 나는 30분이나 일찍 매장에 도착했다. 전날 보건증, 통장사본 등을 챙겨 오라는 문자대로 그날 내 손엔 사회초년생의 빳빳한 서류와 가서 발 아프지 않게 일하라고 부모님이 사준 신발이 들려있었다. 매장에 들어가기 전, 짧게 심호흡을 했다.
"어서 오세요, 000입니다-"
밝은 목소리와 함께 브랜드의 이름이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간단히 목례를 하며 곧바로 '매니저' 명찰을 한 직원에게 내 소개를 했다. '아~어서 와요! 일찍 오셨네요' 내 손에 들린 짐을 보고 빙긋 웃더니 나를 안쪽 스태프 룸으로 안내했다. 웰컴 드링크로 어떤 것을 하겠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거절할까 하다가 모처럼 신경써주시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아이스 초코를 부탁드렸다(절대 공짜 음료수라며 좋아하지 않았다). 음료를 마시다가 유니폼을 받고 환복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서비스직 안 가겠다더니, 유니폼 모자까지 쓰고 머리도 단정하게 올렸네. 거울에 비친 스스로가 웃겼다.
매장에 대한 내 첫인상은 엄청 바쁘고, 시끄러운 데다가 잡일이 많은 곳이었다. 크고 작은 회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시내 한복판 속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란 실로 위협적이었다. 쉴 새 없이 음료 주문이 밀려들고 앞쪽 포스에서는 매니저님이 고객을 상대로 각종 할인 및 이벤트를 꼼꼼히 전달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재빨리 음료를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뒤에 쌓인 설거지, 쓰레기 정리, 물품 채우기 등 크고 작은 잡일을 일사불란하게 해치웠다. 나는 그 바쁘게 흐르는 강에 몸을 담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디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아니 여기에 내가 필요한 게 맞을까?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심정으로 그저 누군가 내게 일을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피크 타임엔 실수하면 안 돼요
(출처: unsplash)
피크타임(Peak time)이란, 어떤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대. 카페나 음식점 같은 외식업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한 마디로 손님이 바글바글 하게 모이는 바쁜 점심, 저녁 시간이 '피크 타임'이다. 우리 매장의 경우,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길게는 2시까지가 피크타임이었다. 피크 타임의 매출에 따라 그날 바쁨의 척도가 결정되는데, 가장 바빴던 날은 1시간에 80만 원대를 웃돌았을 때였다. (우리 매장 기준, 금요일을 제외한 평일엔 50~60만 원대를 웃돌았다) 바쁜 건가? 싶겠지만 무지하게 바쁘다. 첫날 피크 타임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날 가르치던 선배가 내게 당부한 말이 있다.
"피크 타임엔 실수하면 안 돼요" 신입인데 당연히 실수하지 않을까, 싶던 나는 바로 '네-'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피크타임에 실수하면 안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연한 건데, 고객 대부분이 시간이 빠듯한 직장인이라 실수로 음료 제공 시간이 지체되면 바로 컴플레인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따듯한 물을 받았어요
홀 업무는 크게 포스 기계로 주문받기, 음료 제조하기, 제조 음료를 고객에게 최종적으로 전달하는 픽업. 이렇게 3가지로 나뉜다. 신입이었던 나는 음료를 손님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 '픽업' 포지션에 배치받았다. 일은 간단하다. 완성된 음료에 뚜껑을 덮고 홀더를 끼워 진동벨을 울린 뒤 손님에게 음료를 건네면 되는 일이다. 너무 간단한 일인데 여기가 은근 실수 다발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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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따듯한 물이.."
피크타임엔 실수하면 안 돼요-라고 선배가 말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뚜껑을 덮고 있던 내게 한 남자 손님이 황당함과 우스움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맑은 물이 찰랑찰랑 담긴 컵을 들고. 우리 메뉴에 생수가 있었나?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럼 실수했다. 그것도 첫날부터. 음료가 정말 미친 듯이 들어오고 있었고 빨리 픽업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다. 에스프레소 샷이 들어가지도 않은 그냥 물을 손님에게 아메리카노랍시고 건넨 것이었다. 옆에 같이 있던 선배가 나 대신 사과하며 재빨리 새 음료를 손님께 건넸다. 정말 감사하게도 손님은 웃으며 음료를 받아주셨다. 누가 신입 아니랄까봐, 매장에 제대로 신입 신고식을 치렀다.
쏟고, 잘못 나가고, 데고, 헷갈리고, 잘못 말하고
첫 한 달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보통 그날의 실수는 음료 뚜껑을 덮다가 쏟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표기 실수. 과일음료 같이 색깔이 뚜렷한 몇 메뉴를 제외한 커피 음료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뚜껑에 메뉴 이름을 꼭 적어줬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름을 반대로 적는 것은 물론, 음료 약어를 까먹어서 엉뚱한 말을 써놓기도 했다. 이렇게 나만 알아보기식으로 적어놓는 경우, 고객도 직원도 서로 헷갈려서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한동안 나는 그 바쁜 피크시간의 '바'를(커피 머신이 있는 곳으로 음료 제조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바'라고 부른다) 꽤 많이 마비시켰다.
음료 제조를 위한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 '바' (출처: unsplash)
그럴 때마다 쥐구멍에 들어 가서 말이 안 통하는 쥐를 붙잡고 하소연 하고 싶었다.
아무리 직장인들에게 커피 수혈이 필사적이라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냐며. 하지만 정말 신경 쓰였던 건 신입이라 실수하는 게 당연하다며 오히려 내 편을 들어주는 직원들이었다. 내 사고까지 처리해야 했던 내 선배들은 한 달 동안 원래 업무보다 두 배 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수 좀 그만하자.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을 해도 피크타임이 시작되면 나는 어김없이 바보가 되었다. 음료 뚜껑에 아메리카노라고 적어놓고 고객에게 "라떼 드릴게요"라고 잘못 말하고, 다칠 일이 없는 단순한 뚜껑 덮기에서 놀랍게도 손을 데이는 사람.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던 것 같다.
음료로 받은 상처, 음료로 위로받다
(출처: unsplash)
피크 시간에 거하게 사고를 치고 나면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점심시간에는 원하는 음료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었지만, 나는 한동안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카페 음료가 다 싫어졌었으니까. 그러다 우리 매장의 한 메뉴에 꽂혀버리고 말았다. 홍차 맛이 나는 달달한 음료였는데 피크 때마다 꾸준히 한두 잔씩 들어오던 녀석이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어떤 맛인가, 궁금해서 맛본 게 화근이었다. 퇴사하기 직전까지 하루에 1잔 내지는 2잔, 나중에는 그 음료를 마시지 못하면 기분이 우울한 금단현상까지 겪었다. 그래도 내 첫 인생 음료인 홍차 맛 나는 그 음료는 추억이 많다. 직원들이 음료 이름으로 내 별명을 짓기도 했고, 내가 바빠서 못 마신 날에는 먼저 퇴근한 사람이 음료를 만들어 놓고 가주기도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음료 한 잔에 상처 받고 음료 한 잔에 위로받는 날들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