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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사랑

by 안이서

식당 건물 뒤로는 1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햇볕이 내려오는 사이사이에 다양한 꽃들을 심어놓았다. 같은 종끼리 무리 지어 심어놓았기 때문에 산 속인데도 정리가 된 느낌이었다.

제비꽃, 민들레, 패랭이꽃, 은방울꽃…….

나뭇가지 틈새로 연보라와 진한 오렌지 빛이 어우러진 노을이 내려왔다.

허리를 구부려 작은 표지에 적힌 꽃들의 정보를 읽던 나다니엘은 은방울꽃 앞에 멈췄다.

‘순결, 성실, 젊음, 다시 찾은 행복

‘다시…… 찾은 행복’을 읽는데, 나다니엘의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는 이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번졌다. 열여섯 살의 소년 같은 에너지가 이서의 심장을 휘감으며 밀려들었다.

“지금 내 마음이 이 꽃을 꼭 닮았어요.”

이서도 은방울꽃의 꽃말을 알고 있다.

순결, 성실, 젊음, 다시 찾은 행복’

이서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꽃은 지고 흰머리 같은 털을 지닌 열매가 남은 할미꽃으로 갔다. 할미꽃도 나름 꽃을 피우는 때가 있지만, 지금은 꽃이 없다. 이서는 꽃에서 나다니엘로 눈길을 옮겼다.

너무 늦었다. 너무 늦은 만남이다.

이서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성마른 말을 했다.

“순결하다고 하기에는 사랑했던 여자들이 너무 많은데요?”

모든 전생을 통해 이서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인데, 그는 참 많은 여자를 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꼭 상처를 주고자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사실이니까 한 말이다. 또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집 세고, 뻔뻔하고,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 여자의 투정 같은 소리에 상처 입을 위인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나다니엘은 강한 산성에 심장이 녹는 아픔을 감내하는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산책로 옆의 벤치에 풀썩 앉았다. 이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기 옆의 빈자리에 앉으라고 그곳을 손으로 톡톡 쳤다.

이서는 나다니엘의 낙담한 표정이 자신을 이렇게나 아프고 미안하게 만들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서는 그의 옆에 차분히 앉았다.

덩치 큰 나다니엘의 고개가 자그마한 이서의 어깨에 생각을 내려놓듯 기댔다.

“그들이 당신인 줄 알았어요.”

노을을 머금은 밤이 두 사람을 감쌌다. 두 사람을 덮은 밤이 포근한 이불인 듯 나다니엘은 이서의 어깨 베개에 머리를 더 깊이 파묻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이서의 어깨를 적셨다. 민망했는지 나다니엘은 머리를 들어 이서의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코를 훌쩍이면서.

“삼십대 넘어가기 전까지는 이성한테 관심이 없었어요. 전혀 없었어요. 나는 세상 돌아가는 방식에 원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원칙을 밝히고 싶은 욕망만 가득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안에 사랑이 느껴졌어요. 그 감정이 생소하면서도 익숙했어요. 어떤 사람을 보고 사랑을 느낀 게 아니었어요. 이상하죠?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게 누군지 몰라. 도무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요.”

나다니엘은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의 혼돈이 한숨 전체에 묻어나왔다.

“이 땅 어딘가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이 사람인가 싶어 사랑을 주려하면, 조만간에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데 깨달음을 준 여인들이,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여자들이죠.”

나다니엘은 이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길에 이서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느껴졌다. 그의 뺨을 밀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얼른 이서에게 돌아왔다. 그의 시선을 피하면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이 가려지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에 이서가 몸을 돌려 앉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의 취향은 확고하네요.”

이서가 약간의 빈정과 또 약간의 진심과 많은 애정을 담아 말했다.

“내 취향이 어떤데요?”

이서는 여전히 나다니엘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당신, 외모 보잖아요.”

그리고 혼자 생각했다.

‘그 옛날, 당신 내 외모에 홀라당 반했던 것처럼.’

이서의 말에 나다니엘은 격하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도 외모를 따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나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는 거였어요. 내가, 음……, 내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알지요?”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바리스 에테리아.”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그 존재는 이 땅에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다른 별로 떠날 궁리를 시작했어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고야 말겠다는 욕망은, 뭐랄까, 욕망이 아니라 의무감처럼 느껴졌거든요.”

‘의무감’이라는 단어가 이서의 영혼을 후벼 팠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안 쉬어졌다. 아니, 숨은 분명 쉬고 있지만, 산소가 턱없이 부족한 것처럼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어디 아파요?”

나다니엘이 근심 가득한 두 눈으로 이서를 살피며 물었다. 이서는 고개를 흔들고 바르게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노바리스 에테리아에 함께 동행할 영성가를 찾다가 당신을 봤어요. 당신을 보자마자 알아차렸어요. ‘내 사랑이다!’하고요.”

이서가 괜찮은지 두 눈으로 열심히 살피며 물었다.

“당신도 나와의 연결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맞죠?”

두 사람의 눈이 서로의 영혼을 향해 마주보았다. 나다니엘은 확신이 찬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나’라는 존재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서는 조용히 기억을 따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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