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넌 도망친 게 아니라, 여기에 도착한 거야

《말 없는 위로의 도시, 오쓰 Otsu》

by 쓰는사람 명진


“짐이 그게 전부예요?” 픽업 나온 영국인 조니는
나의 단출한 가방을 가리켰다.
“살면서 중요한 건 별로 없잖아요.”라고 대답하곤 쓴웃음이 났어.
가장 무거운 걸 맘에서 꺼내지도 못하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게.


나의 여행은 늘 이런 식이야.

쇼핑도 관심 없고, 관광지를 도는 대신

원래 그곳에 살던 로컬처럼

느슨하게 걷고 익숙한 듯 행동하는 것.

걷고 또 걸어서

모든 골목을 눈에 담아 오는 것

그래서 나는 짐이 별로 필요 없어.


봇짐이 가벼워야 멀리 갈 수 있으니까


조니는 미리 준비한 한국어 관광지도를 내밀었어

그런데 나는 끝내 그걸 펴보지 못했어.

회피하고 싶었나 봐


내 고민과 걱정은 한국어로 저장되어 있고

영어 모드가 켜지면 잠시나마 그걸 끌 수 있으니까

어쩌면 생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고향에서 멀어지는 것.

나의 모국어에서 벗어나는 것

비겁하게도 낯선 곳에서

묘한 편안함이 느껴지더라.



그거 알아?

슬픔보다 더한 고통은 무력감이라는 거.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에너지가 필요한데

아무 힘이 없으면 울 수 조차 없더라.

그저 눈을 깜빡이는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을 뜨고 감는 일밖에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마음이 힘든 이에게는 함부로 ‘기운 내’라는

말조차 하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온몸으로 배우고 있어.

오늘은 다정한 이들이 전해준 맥주 덕분이려나.

눈을 감으면 그대로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꿈도 없이, 깨지도 않고.

“You’re not lost. You’re just here.”
넌 도망친 게 아니라, 여기에 도착한 거야


이 연재는 여행정보 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갑니다. 한 조각씩 읽어도 좋지만, 처음부터 함께 걸어주신다면 슬픔이 희미해지고 다정함이 스며드는 흐름을 더 선명히 느끼실 수 있어요.


1화 :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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