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버스 안내양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아이들은 무엇을 접하느냐에 따라 장래 희망이 수시로 바뀐다. 영어 유치원에서 가르칠 때도 보면 firefighter에 대해 배운 날은 모두들 소방관이 되고 싶고 poice officer를 배운 날은 경찰관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가 괜히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삼 남매 중 첫째로 2살 그리고 4살 터울의 동생들 덕에 일찍부터 자립심을 키웠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10분쯤 가야 하는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다니던 유아원을 계속 다니고 싶어 했다고 엄마가 얘기해 주었다. 거기는 통학 차량이 없었는지 아니면 있어도 내가 사는 곳까지는 오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생들 때문에 나를 매일 데려다줄 수 없었던 엄마는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나를 데리고 딱 한 번 버스를 타고 유아원에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자라서 그 유아원 길을 다시 올라가 봤는데 버스 정류소에서 내려서도 큰 차도 하나를 건너 유아원까지 가는 길이 어른의 발걸음으로도 10분은 족히 걸렸던데 일곱 살짜리 여자 아이가 겁도 없이 몇 개월을 다녔고 부모님 또한 겁도 없이 아이를 혼자 보내셨나 싶다. 그 이후에는 나 혼자 산다 버스를 타고 유아원 졸업을 했다고 하니 음.. 그 당시에 내 인생의 총명함을 다 써버린 건가 싶다.
내가 유아원을 다녔던 때는 1984-5년쯤 되었던 거 같은데 당시에는 버스 안내양이 있던 시절이었다.
버스 안내양이 앞문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버스 문을 두드리며 "오라이~"라고 외치곤 했는데 내가 탔던 버스에도 버스 안내양이 있었다. 하루는 정차해 있던 버스에 간신히 올라타서 버스 요금통 안에 100원을 넣었는데 버스 안내양이 나는 보호자가 없어서 버스 승차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이었던 나는 내가 혼자서도 버스를 잘 타왔고 이미 요금도 지불했으니 타겠다고 얘기를 했으나 그분은 나는 탈 수 없다며 (내 기억 속에는) 나를 밀쳤는데 체구가 작았던 탓인지 버스에서 붕 날아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이 부분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분으로 아마도 상당히 왜곡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버스는 떠났고 나는 울면서 다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의 장래 희망은 "착한" 버스 안내양이 되는 거였다. 나를 밀쳐낸 그 언니처럼 말고 착한 버스 안내양이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꽤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스무 살이 훌쩍 넘었던 어느 날 우리 부모님과 저녁을 먹으며 이 이야기를 했더니 두 분 또한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다른 집 아이들은 대통령, 의사, 선생님, 간호사 이런 직업들이 장래 희망이었는데 두 분의 딸은 착한 안내양이 되겠다고 해서 은근히 실망하셨다고.
언제 그 꿈이 더 이상 내 꿈이 아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착하고 남을 도와주는" 부분은 내 성향이기도 하고 또 내가 그렇게 살고 싶은 방향성이기도 했던 것 같다. 착함의 정의는 어릴 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의 방향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기고 전진했던 것 같다.
이후에도 내 꿈은 상당히 특이했다. 국민 초등학교 때 동생들이랑 보았던 일본 영화 "후레쉬맨"에 꽂혀서 그들을 만나러 행성에 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천문학자를 꿈꾸었지만 중학교 때 처음 배운 지구 과학이 너무 어려워 그 꿈을 고이 접어야 했고 어느 드라마에서 보았던 특수 유아 교사가 너무 고귀해 보여 고 3 때까지 특수 교육학과를 목표로 공부했었다. 현실은 냉혹하여 수능을 치고 안전 지원을 하기 위해 특수 교육 학과보다 조금 점수가 낮았던 컴퓨터 교육 학과에 지원했지만 나 같은 학생들이 많았던 탓에 내가 원했던 학교의 학과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다른 학교의 외국어 문학부에도 지원을 했는데 거기서 합격 통지를 받았고 재수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그냥 이 학교를 다니기로 했는데 그 선택이 내가 생각했던 나의 삶의 방향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돌아보면 "착하게" 살고 싶었던 나의 삶의 방향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