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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I Sep 01. 2024

컬러링

COLORING - 단편집 미히버스(MIHIVERSE) 수록작

어느날 회사 로비에서 나는 가벼운 미시감(未視感)을 느꼈다.


'사무실이 몇 층이었지?'


다행히 아는 동료가 누른 층을 보고 엘레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4라는 숫자가 빛나고 있었다.


'아, 4층이었어.'


사무실에 들어간 나는 또 한 번 혼란을 느꼈다.


'내 자리가 어디지?'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보라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낯선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묘한 기시감(旣視感)이 들었다.


'이 남자는 누굴까?'


골똘이 생각하는 나를 두고, 그가 다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게 있을까요?"


"네.. 제 자리가 어디죠?"


"보라님 자리는 동쪽 2번째에요."


"아, 네. 그렇군요."


나는 동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대학교 때부터 쓰던 텀블러와, 노트북, 전화기, 가방이 눈에 보였다.


그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혹시 누구시죠?"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저 이푸른 주임입니다. 기억 안나세요?"


그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저희 입사 동기잖아요."


나는 그의 얼굴을 샅샅히 살폈다. 이제서야 그가 기억이 났다. 신입 연수에서 같은 조였던 사람. 며칠이 지나 눈에 보이지 않자, 나는 그가 퇴사한 거라고 여겼었다.


"아 맞죠. 저희 4조였죠. 푸른 주임님은 자리가 어디세요?"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보라님 옆 테이블이요. 이상하네요. 생각해보니 그동안 제가 말하는 거에 한번도 대답한 적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나는 기억을 꼼꼼히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그가 옆자리에 앉았던 기억은 없었다.


"네 푸른님.. 오늘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아니면 회사가 이상한걸지도요. 혹시 푸른님은 회사에 이상한게 없으신가요?"


"아 회사요. 달라진게 있죠."


그가 손으로 천장으로 가리켰다. "조명 색을 바꿨잖아요. 3주 전부터 공지하던 대로."


"파란불빛으로 바뀌니 조금 낯설긴 하네요. 차분해지기도 하고, 바닷속처럼 신비롭기도 하고, 어쩌면 조금 서늘한 것도 같고, 약간 쓸쓸하기도 해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그제서야 조명색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리에 앉은 나는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컴퓨터 화면은 푸르스름했다. 내 텀블러는 파란색이 되어 있었다. 초록색 텀블러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대학교 때 처음 샀을 때는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흐릿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 부장에게 메일이 와있었다.


'이 글을 읽으면 전화바랍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의 휴대폰 액정 색이 바뀌어 있었다. "블루라이트가 고장났나."  


부장의 전화연결음은 잔잔한 배경음악에 회사 소개가 나오는 컬러링이었다.  "안녕하세요, 글로벌 프리미엄 색깔 브랜드 콜로로(COLORO)입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최상의 색깔을 제공합니다. 지금 바로 감각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해보세요!"


매번 듣는 그의 컬러링이었지만 오늘 따라 새로웠다. 마치 그녀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백 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보라씨, 이번에 새로운 컬러링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어. 회사에서 아주 기대가 큰 건이야. 보라씨가 한번 맡아봐."


"정말 제가 담당하는 거 맞죠, 부장님?"


그 프로젝트는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당연히 과장급에게 순서가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이 기회가 오다니.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라씨. 이번 일은 보라씨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기회야. 주 홍 차장을 봐. 5년동안 그는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초고속 승진을 해냈지. 이제 그 자리를 보라씨가 맡는거야.


보라색을 130배 더 늘리려고 해. 사람들의 수요가 많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람들은 더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색깔을 원한단 말이지.


알지? 회사 생활하면서 운이 제일 중요한거. 이번에 보라씨에게 그 운이 왔다고 생각해."


전화를 끊었다. 보라색을 130배 늘리는 일. 세상이 앞으로 더 다양한 보라색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문득 비어 있는 앞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맞은편에 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가의 말


파란 불빛과 함께 사라진 맞은편 자리는 누구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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