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벌통 앞 풍경
공화국의 벌통 앞에서 꿀벌이 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외출을 미행하며 몰래 엿보듯 설레고 흥미롭다. 벌통 출입구로 서서히 걸어 나와 하늘로 '뿅' 하고 날아가는 모습은, 경비행기가 활주로를 지나 지면을 박차고 이륙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벌통 앞에서 그들이 하늘로 날아다니는 광경은 우리에게는 재미있고 생동감이 있는 구경거리이지만, 그 모습의 이면에는 우리가 읽어 볼 수 있는 꿀벌의 결연한 삶의 표정이 담겨있다.
아직도 추운 겨울이어서 영하의 추위를 이기려, 벌통 속에서는 여전히 일벌들이 뭉쳐서 서로를 보듬고 있다. 하지만, 모처럼 벌통 입구로 비친 한낮의 온화한 햇살에 성질 급한 일벌들이 한두 마리씩 연이어 밖으로 튀어나와 벌통 주변을 힘겨운 날갯짓으로 선회한다.
겨울 동안 꾹 참아왔던 '배설'을 위한 비행이다. 공화국이 생활하는 벌통의 청결과 위생을 위해, 벌통 내부에서는 배설하지 않는 것이 그들 생활 철칙 중 하나다. 그래서 초봄이 되면 제일 먼저 외출하는 목적이 배설하기 위함이다.
배설의 후련함도 잠시일 뿐, 날다가 온기를 잃은 일벌들은 땅에 떨어져 가쁜 숨을 쉬다가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춘다. 추운 날씨에 서로 밀착해서 체온을 나누기 위해 꼭꼭 뭉쳐있는 무리를 이탈하여 함부로 밖에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건 대단한 모험이다. 이런 모습으로 많은 수의 일벌이 죽는 것은 우리나라 꿀벌 실종의 한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기후 온난화로 겨울철 날씨가 변동이 심해, 꿀벌이 월동 과정에서 안정을 취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행히 참았던 배설을 비행 중에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는 일벌의 뒷모습은 무척 당당하고 대견하다.
봄꽃이 만발하면 젊은 일벌은 쏜살같이 나가서, 멀게는 십리(4km) 길 너머까지 꽃을 찾아가 꿀을 빨아온다. 뒷다리엔 꽃가루(화분)를 뭉쳐오는데, 꿀과 꽃가루가 그들이 먹는 식량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꿀은 밥과 빵이고, 화분은 고기반찬과 비타민, 미네랄 양념이다.
벌통 안에서 충분히 예열을 마친 일벌은 문 앞으로 서서히 걸어 나와, 뿅 하고 이륙하여 하늘로 치솟는다.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이미 정찰벌이나 먼저 다녀온 일벌들의 '춤'을 통해 위치 정보를 습득했기 때문이다.
수십 혹은 수백 송이의 꽃에서 꽃꿀을 빨아 '꿀 주머니'에 가득 채우거나, 몸에 뒤집어쓴 꽃가루를 쓸어 모아 뒷다리의 '털 바구니'에 단단히 뭉쳐 넣은 일벌이 연속해서 벌통으로 돌아와 문 앞에 무거운 몸을 툭 떨군다. 그리고 어린 벌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간다.
화창한 봄날, 벌통 앞에서 분주하게 드나드는 일벌들의 일사불란한 '출역'과 '귀소'의 모습은 참으로 다이내믹하다. 우리가 이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게으름이나 고뇌와 절망을 떠올리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 정오 무렵 전후로 만 마리 이상의 일벌이 벌통 문으로 일시에 쏟아져 나온다. 나온 즉시 온 하늘을 뒤덮고 빙빙 날며 거대한 운무를 이룬다. 이 모습에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평생에 한 번쯤 보아야 할 경이로운 '분봉' 장면이다. 이때 그들은 즐거운 축제 분위이기 때문에 모든 벌들이 아주 온순하여, 날아다니는 벌 무리의 곁에 가도 좀처럼 쏘지 않는다.
봄이 되어 월동을 마친 여왕벌이 다시 알을 낳기 시작하면, 공화국의 일벌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보통은 겨울철 만 마리 정도에서 삼사만 마리까지 점차 불어난다. 또한 봄 꽃에서 수집한 꿀이 벌집에 가득 차면, 벌통 내부가 비좁아 포화상태에 이른다. 이 상황을 대비해 일벌들이 애지중지 키운 '새 여왕벌'이 태어날 쯤이 되면, 공화국 일벌의 절반 이상이 새로운 공화국의 터전으로 이주하기 위해 기존 여왕벌을 데리고, 분봉을 한다. 이 행사는 공화국이 분할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그들만의 성대한 축제의 장이다.
분봉한 일벌 무리는 주로 가까운 나뭇가지에 서로 뭉쳐서 일차 운집하는데, 그동안 정찰벌이 그 주변을 돌아다니며 정착할 마땅한 장소를 찾는다. 몇 시간이나 하루이틀을 지나서 가장 안전하고 꽃이 많은 장소를 찾아 서로 결정을 하면, 그 위치로 단숨에 이동하여 집을 짓고 새로운 공화국을 이룬다. 자연계에 흔치 않은 그들만의 집단 번식이다.
분봉 후 임시로 일차 운집하여 뭉쳐있을 때, 이를 발견하여 무리를 새 벌통에 털어서 수용하면 안전하고 손쉽게 공화국의 터전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정찰벌들은 탐색을 중지하고 새 벌통에 같이 정착한다.
분봉하여 나가고, 남아 있는 어미 공화국 벌통은 분할의 축제를 마치고 안정과 여유를 되찾는다. 새로 태어난 여왕벌이 짝짓기를 마치고 매일 많은 알을 낳아서 일벌의 수가 점차 늘어난다. 다시 정상적인 공화국으로 세력을 회복한다.
바람 없고 햇볕이 따뜻한 날, 아직 몸에 뽀송한 털을 가진 어린 일벌 수 천마리가 교대로 문 앞에서 날아오른다. 머리를 문을 향하여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옹기종기 모여서 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참 귀엽다.
공화국의 따뜻한 둥지 안에서 편안히 지내다 이제 야생 세계로 나가서 먹이를 구해 와야 하는 두려움과 긴장감도 잊은 듯, 햇병아리처럼 즐겁게 붕붕 거리며 공중 걸음마를 한다. 다른 벌과 서로 몸이 부딪힐 만도 한데, 눈을 씻고 보아도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신기하다. 각자 자신이 정한 항로가 있어 그 길만 따르고, 결코 다른 벌의 항로를 넘보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타인의 항로를 탐하거나, 배척하기 일쑤인데 말이다.
일벌은 번데기를 거쳐 벌 모습을 갖춘 성충으로 태어나면 20일 정도의 어린 시절을 벌통 안에서 지낸다. 이 기간에는 태어난 날짜에 따라 차례로 일을 분담해서 육각형 벌방을 청소하고 애벌레에게 먹이를 주고, 여왕벌을 돌보고 수집한 식량을 받아 정리하고, 벌집을 짓고 출입문을 지키는 일을 순차적으로 담당한다. 이런 일련의 임무를 완수하여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바깥에 나가 식량을 조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를 위해 사나흘 동안 비행 연습이 필요하다. 발통의 위치를 익히고 비행능력을 키우는 작업이다.
이러한 일벌의 비행연습 광경은 봄 여름의 바람이 없는 따뜻한 날, 햇볕이 많은 낮 시간에 쉽게 볼 수 있다. 예전 우리 양봉가들은 이 장면을 꿀벌의 '낮놀이'라 불렀다.
봄날 따뜻한 오후, 몸집이 아주 큰 여왕벌이 벌통 입구로 갑자기 나타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단호하게 발판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간다. 멀리 공중에서 '짝짓기'를 하기 위한 비행이다.
주위에 호위하는 일벌조차 없다. 보통 벌통 안에서는 항상 대여섯 마리의 일벌 호위대가 수행하지만, 여왕벌이 외출하여 공중에 오를 때는 외롭게 단독 행차를 한다. 일벌은 무사히 여왕벌이 귀환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릴 것이다. 벌통을 떠난 여왕벌은 주변을 한두 차례 선회하며 벌통 위치와 방향을 점검하고, 하늘 높이 날아간다. 여왕벌의 짝짓기 비행은 운이 좋아야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다.
꿀벌 공화국에서 새로운 여왕벌이 태어나 일주일 정도 성숙 과정을 거치면, 외부로 나가서 '짝짓기' 여행을 떠난다. 보통 2km 이하의 거리이지만, 환경에 따라서는 4km 이상도 다녀온다. 친족 간 결혼을 피하고 혈연이 다른 건강한 여러 마리 수벌들(10마리 이상)과 짝짓기를 하기 위함이다. 공화국에 다양하고 우수한 유전형질을 가진 자손을 보유하기 위한 비책이다. 이천만 년을 지구상에 존속시킨 꿀벌 공화국의 각별한 진화 수단이다.
여왕벌이 외출한 지 30분에서 한두 시간 정도가 지나면, 벌통 앞에서 교미를 마친 여왕벌이 꽁무니에 하얀 실오라기 같은 수벌의 생식기를 달고 들어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수벌은 교미 후에 생식기가 이탈하여 죽는다). 마지막 교미한 수벌의 생식기인데, 그날 밤 벌통 안에서 수벌들에 의해 제거된다. 여러 마리의 수벌이 남긴 정액은 난소관 옆의 정자 주머니에 저장되어, 여왕벌이 평생 알을 낳는 데 사용된다.
여왕벌은 이 이후로는 평생 동안 공화국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
이외에도 꿀벌이 비행하는 이유가 여럿 있다. 예를 들면, 다른 공화국 벌통에서 꿀을 훔쳐오기, 자신이 속한 공화국에서 이탈하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등이다. 나중에 기회 되는 대로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