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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Jan 11. 2023

느린 사람을 위한 변명

그림책 <안녕하세요>를 읽고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달려갔으면 좋겠다'

라고 썼다가 '느린 사람을 위한 변명'으로 제목을 바꿔 쓴다.

다른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제목이 아니라 내가 쓰고 싶은 제목.


여기 몸과 마음이 텅 빈 사람이 있다.

텅 빈 그에게 안녕하시냐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우리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일단 텅 빈 그에게 묻기로 한다.

지금 안녕하시냐고, 그렇게 텅 빈 채로 있으면서 정말 괜찮냐고 말이다.

텅 빈 그도 나름대로 애를 쓴다. 병원에도 가 보고, 텅 빈 몸과 마음을 채우기 위해 마트에서 물건도 잔뜩 사고, 동물과 식물도 가까이해 보고, 예술작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혼자서 계속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면서도 자신의 가방만큼은 놓지 않고 일상을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 눈에 자신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렇게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과 닮은 텅 빈 그녀와 스쳐 지나게 되고, 텅 빈 그의 가슴에 붉은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림책 <안녕하세요>는 텅 빈 몸과 마음을 궁극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은 물질이나 취미생활, 예술품이 아니라 결국 사람과의 관계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그 답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이렇게 쓰려고 했다.

'그가 용기 내어 그녀에게 달려갔으면 좋겠다. 두 손을 맞잡고 텅 빈 몸과 마음이 가득 채워질 수 있게. 행복할 수 있게'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느린 그를 대신하여 변명을 쓰려고 한다. 물론 그가 내게 요청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텅 빈 그와 텅 빈 그녀가 스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먼저 뛰었고, 그는 그녀를 지나쳐 걸어가다가 뒤늦게 자신의 심장이 붉게 뛰고 있음을 알뒤를 돌아본다.

그는 참 느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반응 속도가 느린 사람. 행동도 느리고 생각도 느린 사람. 그래서 표현도 느린 사람.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미리 준비하고 연습하고 몇 번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


몸과 마음이 텅 빈 사람이 집 밖을 나서면서 내내 들고 다니는 붉은 가방이 있다.

자신의 심장 같은 붉은 가방은 그가 살아내야 할 일상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감당해야 할 제 몫이 있다.

당연히 해야 하고, 누구나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힘에 부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하고 혹시나 잘못되진 않았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자신의 느린 속도 때문에 피해 주는 일이 없도록, 빠르게 훅훅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주변에, 일상에, 타인에 온통 신경을 다 쓰고 나면 너무 지쳐서 자신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

다시 또 출근하고 생활해야 하니까. 그게 어른이니까.

텅 빈 그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의 몫을 다하기 위해, 적어도 민폐 끼치는 사람은 되지 않기 위해, 심장 같다고 여기는 붉은 가방을 손에 꼭 쥐고 집을 나서지 않았을까?

오늘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출근하고 있기 때문에 사고 싶은 걸 사고, 보고 싶은 걸 보고, 먹고 싶은 걸 먹는다고, 남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적당히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에게 달리 특별한 방법이 있겠는가?

행동도 생각도 느린 그가 이런 일상조차 살아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였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에게 다시 다른 삶을 살라고 하면 엄두가 나겠는가?

느려터진 생각만큼 행동도 느린 그가 쉽게 방향을 바꾸고 그녀에게 달려갈 수 겠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왜 가만히 있냐고, 답답하지 않냐고, 텅 빈 채로 그렇게 사는 게 안녕하냐고, 지금이라도 당장 달라져야 하지 않냐고, 용기를 내보라고, 어서 달려가라고......


제 마음을 자각하고 새롭게 고쳐먹는 일은 느린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먹고 살 수 있음도 불구하고 시린 바람처럼 껴지는 헛헛함은 예쁜 옷을 사고, 맛난 것을 먹고, 멋진 풍경을 보고, 책을 읽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뭐 특별한 게 있는 줄 냐고, 제발 배부른 소리 그만하고 철 좀 들라고 마음 한편에서 나를 혼내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행복할 것 같냐고, 더 늦기 전에 한 번쯤은 해야 되는  말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왜 이렇게 비겁하게 사는 거냐고 나를 아프게 들쑤신다.

가끔은 일상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꿈과 의지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힐끔거리며,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계획도 세워보지만 여전히 제자리인 것을 보면 나는 느릴 뿐만 아니라 참으로 으르고 용감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모른 척 외면하다가도 심장이 새롭게 뛰는 게 느껴지면 제자리에서 뒤만 돌아보는...


다시 그림책으로 돌아온다.

표지를 넘기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속지에는 집 밖을 나서기 전에 거울 속 자신을 비춰보는 텅 빈 그의 모습이 보인다.

이 속지를 넘기면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거울 속 텅 빈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그가 등장한다.


그림책의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뒤늦게 제 심장이 붉게 뛰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보는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는 대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책에서만큼이라도 그가 심장이 터지도록 그녀에게 열심히 달려가기를 바라지만, 내가 그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내 심장이 왜 이러지?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하지? 달려가야 하나? 그녀를 붙잡고 뭐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 뒤엔 해야 하지?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는 것도 느린 그는 한참을 그 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오래오래 생각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결국 제풀에 식어버린 심장을 다시 품고 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겠지.

그리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거울 앞에 서서 텅 빈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잠들었을 것이다. 아침이 오면 다시 거울 앞에 서서 텅 빈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붉은 가방을 챙겨 집 밖을 나설 것이다.


어떤 날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책하고, 어떤 날은 위로하고, 또 어떤 날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고 또 보는 동안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생길 것이라 믿는다.

제 몫을 살아내는 성실함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도 서서히 스며들어 미미하지만 텅 빈 자신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를 기어이 찾아내고, 느리게 느리게 달라질 용기도 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적어도 당신을 위해서만큼은 조급하게 다그치지 말고 당신의 속도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길!

그러다가 한 번쯤은 오롯이 당신만을 위해 용기 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것은 텅 비고 느린 그가 안녕하길 바라는 응원이며, 내게 보내는 인사다.


그림책 <안녕하세요>는 카타리나 소브럴이 지었다.

느린 그와 나를 위해 변명할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

다들 안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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