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이렇다 할,

< 아이 섀도우 >

by sepH

바람이 불고 공기의 온도가 제법 차가워졌다. 어둠도 빨리 내려앉고 손님의 발걸음도 빨리 끊기는 것 같은 월요일이었다. 서둘러 마감을 하고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운동을 할 채비를 하고 근처 드럭 스토어에 갔다. 분홍빛이 낮게 섞여있는 톤 다운된 아이 섀도우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목사님 두 분이 결혼하시던 날, 신부가 될 목사님의 메이크업을 할 일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신부에게 어울릴 만한 메이크업을 찾아보고 목사님께 어울릴 만한 색을 생각하고 아이 섀도우와 치크, 립의 칼라를 어떻게 해야 할지, 헤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결정해야 했다. 결혼식날 카페를 조금 늦게 오픈할 생각을 하고 큰 거울과 화장품, 브러쉬들을 펼쳐놓고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하고도 낯선 느낌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오랫동안 마주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는 순간이었다.


점점 화장이라고는 기껏해야 비비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것이 다이다. 사실 눈썹도 그리는 게 참 귀찮은데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얼굴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여기 눈썹이 있어요. 얼굴이 시작된답니다. 눈이 여기 있으니까 그 아래로 코와 입도 있어요.’ 하는 표지 같은 느낌으로 그나마 눈썹을 그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퇴근하고 욕실 거울 앞에 섰을 때 눈 밑에 그늘진 다크 서클을 보며 내게도 이런 게 생기는구나 싶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입술이라도 바르지 그러냐는 남동생의 말을 들었던 날도 떠오른다. 화장을 하지 않아 말간 물 같은 어느 배우의 얼굴이 좋아서 그렇게 하고 다니다가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기겁한 날도 떠오른다. 나는 말갈 수 없었다. 타고나기를 피부가 얇아 볼이 빨갛고 온도 변화, 감정 변화, 몸의 컨디션에 따라 빨갛기를 마다하지 않은 얼굴이며, 평소에도 붉은 홍조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제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는 시간들이 얼굴에 드러나는 나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서?, 다시 화장이 하고 싶어 졌다. 피부의 모든 잡티를 가리는 뽀얀 화장을 한다는 게 아니라 내 얼굴에 대한 최소한의 정성을 그려 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는 것이다. 몇 가지 기초 제품을 바르고 눈썹을 쓱쓱 그리고 머리를 말리면 그게 출근 준비의 끝인 지금에 비해 시간을 조금 더 들여야 하지만 원하는 섀도우를 펴 바르고 뷰러를 집고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를 바르는 행위에서 오는 약간의 희열 같은 오래 전의 기억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 대학을 들어가 처음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화장을 하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정성을 들여 눈썹의 대칭을 맞추고자 애썼다. 눈썹의 반은 날려 날카롭고 선명한 눈썹의 꼬리를 그려 넣고 섀도우는 베이스부터 최소 3가지의 단계에 맞춰 색상을 펴 바르고 반질거리는 필름형 아이라인을 그려 넣었으며 때론 눈꺼풀까지 집어 가며 속눈썹을 바짝 올려 마스카라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 쓴 마스카라의 솔을 태우고 드러나는 뼈대에 라이터 불로 달궈 더욱더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속눈썹을 끌어올렸었다. 콧등이며 눈 아래를 참 성실히도 밝혔고 작은 입을 라인으로 크게 그리고 립스틱을 열심히 채워 바른 다음 티슈로 찍어 다시 덧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외출을 하려면 화장하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 이상을 할애하고 그다음 다시 머리를 만져야 했다. 참, 정말 참도 성실히 부지런했었다.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메이크업을 가르치는 직업이었으니 더 정교했을 테고 더 기교를 부렸을 테다. 지금은 15분이면 끝난다. 얼굴과 머리를 합쳐 15분.


신부화장을 해야 하는 날을 앞두고 가지고 있던 브러시를 오랜만에 꺼내 세척하고 색조 제품들을 정리하던 날 밤,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여전히도 가지고 있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었다. 한참을 버렸던 날이 틀림없이 있었는데 아직도 메이크업 박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화장품들을 보면서 그때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그때의 나도 떠올려봤었다. 오래된 것은 다시 또 버리고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도 정리하면서 입술과 눈에 한 번씩 찍어 발라도 보았다. 그날 부턴가, 다시 메이크업이 하고 싶어 지기 시작했던 게.... 그날 밤, 과거의 나를 만났던 걸까?


어제 새로 산 섀도우로 눈 두덩이에 펴 바르면서, 이젠 메이크업도, 얼굴도 예전에 나에서는 멀어졌으나 그때와 다른 깊이의 선명함과 정성을 얼굴에 한 겹 한 겹 올렸다. 눈 밑에 자꾸 묻어나는 마스카라를 손으로 닦으면서도 귀찮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이 또 어설프려나 싶지만 지금의 나는 표정도, 말투도, 생각도 스무 살 나와는 달라졌있다.안다. 그때보다 더 고려하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인 것도. 그러니 그때만큼 싱그러움을 앞세운 어설픔을 보이는 건 맞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고, 늙어가는 것이라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린 나와 조금씩 멀어지면서 예전과 다른 정성을, 성실함을, 부지런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쓸 줄 알게 된 지금. 인생의 무게와 별개로 나쁘지 않구나. 아니, 어쩌면 그 무게로 내가 이만큼 성숙하였을지도 모르겠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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