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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바다 Aug 24. 2021

우연이 운명이 되는 순간

8. #밝혀진과거 #그저흔한길냥이



 어느 날 친구 C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지내냐는 흔한 안부의 인사였는데, 최근에 길냥이를 입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나에게 하얀이에 대해 물어왔다.


친구 C와의 대화. 참고로 집사에게 고양이에 대해 묻는다면 사진 테러를 각오하시길.


 사실 나는 처음에 C가 하얀이에 대해 물어온 것이 안부의 연장선상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친구, 엄청난 애묘인이었다. 하얀이의 귀가 잘린 것을 보고 TNR*을 언급하고 임시 보호에 대해서도 물어보는 것 아닌가? (*Trap/포획, Neuter/중성화 수술, Return/제자리 방사의 앞 글자를 딴 말로, 길고양이 개체 수 증가를 막아 사람과 길고양이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환경을 만든다.) 원래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으나 알레르기 때문에 키우지 못한다는 C는 털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푸들을 키우고 있을 정도로 동물을 좋아했다.


 하얀이를 데려오고 나서 반려 인간(?)들에게 나도 모르게 엄청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기분 좋게 C에게 하얀이 사진을 테러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가 하얀이에 대해서 이상할 정도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만큼 궁금한가 보다 싶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데려왔는지를 너무나 자세하게 물어와서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친구가 '아닐 수도 있는데 너무 닮았다'며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하나를 캡처한 사진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C가 보내준, 출처 모를 하얀이의 사진


 캡처된 사진을 자세히 보니 야밤에 어떤 풀숲 같은 곳 한가운데에 식빵을 굽고 있는 하얀 물체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한쪽 귀는 많이 잘려 있고, 얼굴이 조금 억울하게 생긴 것이... 하얀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진이지 싶어 나는 물었다.


 "뭐야? 하얀이가 왜 여깄어?"

 "그치그치? 얘 하얀이 맞지?"

 "응 맞는 것 같은데... 아니, 이거 무슨 사진이야?"

 "언니 대애애애박!"




*2019년 6월*


 친구 C는 학교 근처에 있는 천을 따라 걷다가 풀숲에서 방황하던 고양이 두 마리를 발견했다. 그 천 주변은 사람들이 산책을 많이 하는 곳으로, 고양이가 스스로 내려갈 법한 곳이 아니었다. 의아하게 여긴 C는 고양이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이어서 천이 많이 불어 있는 상태였다. 숨을 곳도 없이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의 옆에 꼭 붙은 채 들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는데, 둘 다 한쪽 귀가 잘려있는 것으로 보아 중성화를 한 뒤 방사한 것 같았다.

 그대로 두면 고양이들이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한 C는 구조를 결심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길이니 고양이들이 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천은 평소에도 범람이 잘 되는 곳이었다. 안 그래도 장마철이 다가오는데 고양이들이 그 근처에 있다가 물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C는 일단 학교 커뮤니티에 임시보호 요청 글을 올렸다.


2019년 6월, 친구가 학교 커뮤니티에 올린 임시보호 요청 글(왼쪽)과 사진 확대(오른쪽)


 그 뒤 C는 곧바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하얀 고양이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회색 고양이는 경계심이 많아 사람이 조금만 다가가도 도망쳤기에 잡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하얀 고양이는 커뮤니티를 통해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 온 사람에게 임시 보호 목적으로 보내졌고, C는 1년 넘게 그 후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고양이를 입양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나와 자주 연락을 하던 사이도 아니었고, 카톡을 잘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C는 이상하게도 나에게 연락을 해야 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입양했다고 보내준 하얀이의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애인 것 같아서 친구는 자기가 올렸던 글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확신이 들자 나에게 자신이 썼던 글을 캡처해서 보내주었다.


가운데가 구조 당시 하얀이의 사진이고, 맨 왼쪽과 맨 오른쪽이 내가 찍은 하얀이의 사진이다. 추측일 뿐이지만 아무리 봐도 하얀이가 맞는 것 같다. 심지어 발견되었던 곳도 가깝다.


 하얀이가 어쩌다 다시 길거리에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임시 보호 끝에 방사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C는 임보를 해주겠다는 사람이 안 그래도 처음부터 '임시'만 가능하지 계속 키우지는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의 추측은 하지 않기도 했다. 어쨌든 하얀이는 무사히 방사되어 구조되었던 지역 근처에 자신의 영역을 잡았고, 그곳에서 나와 만났으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같이 있던 회색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내 친구 같은 사람에 의해 구조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아직 새끼였기 때문에 하얀이보다 입양은 더 잘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21년 3월*


 그날 나는 그렇게나 궁금해하던 하얀이의 이야기 한 조각을 주우면서 '우연'과 '운명'을 연결시켜 보았다. 그리고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하얀이를 신경 써 주었기 때문에, 그 인연이 돌고 돌아 나에게 온 것 같다고. 만약 C가 하얀이를 구조해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을 고려해 액션을 취해준 친구가 나는 고마웠다. 단순히 길고양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에게 새삼스럽게 다가온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하얀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저 수많은 길냥이 중에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전의 나에게도 하얀이는 그저 지나가는 길고양이 한 마리에 불과했다. 만약 그때의 내가 C의 글을 읽었더라면 두 마리 고양이의 사진과 사연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 당시의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때'와 '지금' 사이의 어느 곳에서 나는 하얀 애를 만났고, 계속된 만남 끝에 하얀 애는 '하얀이'가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 C가 쓴 글은 하얀이의 소중한 과거의 한 조각이었다. 그리고 이 지구 상에는 그런 식으로 수많은 만남(a.k.a. 간택)들이 이루어져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한때 나에게도 하얀이는 다만 지나가는 길냥이 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 말은 뒤집으면 다음과 같았다.


'길 위의 모든 고양이는 누군가에게 하얀이가 될 수 있다.'


 그 뒤로 나의 눈에 길거리의 고양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래는 하얀이만 보였는데, 이제는 모든 길냥이들이 하얀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는 변했다.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길거리의 동물을 만지지도 않는 사람이었 내가 어느 순간부터 다음과 같이 안 하던 짓을 하 있었던 것이다.


길냥이를 보면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고 흐뭇해한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 벌러덩 누워있는 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된다.

가끔 가다 기력이 없고 지쳐 보이는 애를 보면 편의점에서 캔을 사 와서 먹이기까지!


내가 동네에서 찍거나 혹은 놀러 가서 찍은 길냥이 사진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고백하자면 나는 한때 길냥이에게 밥을 주는 것이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리 만족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같은 입장이 되어보니 그냥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배를 곯을 생명에 대한 관심의 결과이고, 생명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액션'이라는 것을.


 게다가 생각해보면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땅 위에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인간이 집 지은 곳은 동시에 또 다른 존재들의 집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아파트를 세우고 도로를 깔았기 때문에 길냥이들이 마음 편히 쉬고 사냥하던 영역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들에게 가끔씩 밥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어졌다.




 또 다른 액션을 취하기로 결심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물연대와 유기동물 입양 앱에 후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10년째 이어가고 있는 아동 후원처럼, 두 곳에 한 달에 한 번씩 만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내가 느낀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몰랐던 세계를, 여전히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었다. 결국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스토리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혼자 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아직 고양이 입덕 초보자였으니까!


 고민 끝에 나는 학교 커뮤니티에 사람을 모집하는 글을 올렸다. 하얀이와 나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풀어놓고 길냥이 콘텐츠 제작을 위해 함께 할 동료를 구한다고 적었다.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내가 쓴 자격조건은 딱 한 가지였다.


 ☞ 길냥이가 살기 좋은 세상이 결국 인간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말에 동의하시는 분 ☜


 누구에게는 뜬금없는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풀어쓰자면 나는 하얀이를 통해 이웃사촌을 여럿 만났다.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마음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얀이를 신경 쓰는 것처럼 나를 신경 써 주었다. 자취하는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주기적으로 안부를 물었다. 대화의 주제는 고양이일 때도 있었지만 고양이가 아닐 때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궁금해했다. 2년 동안 살아도 생소하기만 했던 동네가 새로운 인연들로 채워지면서 특별해졌다. 좀 더 의미 있는 곳이 되었고, 계속 살고 싶은 곳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결국엔 사람으로까지 향한다.
그 마음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


 그 마음은 이미 길거리에 놓인 밥그릇마다 담겨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쓰는 나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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