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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May 24. 2016

내 생애 가장 맛있던

<내 생애 가장 맛있던>


랍스터를 넣어 끓인 라면이 지금껏 먹어 본 라면 중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니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게 뭐 특별한 맛이 있겠는가?

궁금하기는 해도 '글쎄...그렇게 좋은 맛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어 W시 자유시장 밑에서 먹던 라면 생각이 났다.

본래 돼지국밥을 만들어 팔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 이른 아침, 라면을 끓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단골의 갑질(?)이었다고나 할까.

입이 깔깔하다는 말에 조금 귀찮았을 아주머니께서는 그래도 무던한 표정으로 돼지국밥 국물로 라면을 끓여 주셨는데 그게 바로 내 생애 가장 맛있는 라면 중 하나가 되었다.


조금 비겁한 표현인지 몰라도 내 생애 가장 맛있는 라면은 그날의 추억을 함께 먹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완이형이 아껴 두었다가 끓여 준 라면도 정말 맛있었고 구로시장 한 켠에 기대어 살 때에 먹은 80원짜리 삼양라면도 맛있었다. 국수를 넣어 먹는 라면도 지금 생각해 보니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시골로 이사 갔을 때 퉁퉁 불어버린 라면을 건져 먹던 기억도 좋다.


아마도 국물 때문이었을 것 같아 언제인가 한번은 집에서 엄니가 끓여 둔 쇠고기 무국의 국물만 가지고 끓였는데 영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뭐든 한번에 많이 끓여야 맛있다는 엄니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

시장 골목에서 돼지국밥 국물에 푹푹 끓여 내어 준 라면이라야 그맛이 날테지.

지금도 그곳이 남아 있을지 궁금하다.


돼지국밥을 말아주던 골목 반대편에는 떡볶이집이 있었는데 그 당시  밀가루떡볶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만두튀김을 소스에 묻었다.

떡볶이 소스에 묻혀 내어 주는 만두를 천천히 먹다 보면 만두피가 터지기 마련이었는데 그럴 때에는 숟가락으로 퍼 넣기도 했다.

골목에는 여러 가게들이 있었다.

입사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찾아가던 칼국수집 아직도 있을까?

아니, 어려울 것이다.

그곳에선 그 당시에도 허리가 반쯤 굽은 할머니께서 가만히 가만히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끓여 주셨는데 아마 지금은 소천하셨을테지.

따님께서 함께 칼국수를 만들어 팔던 곳이었는데 지금쯤은 울엄니와 비슷한 연세로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구나.

후문으로 나와 사거리 나가는 좁은 길로 나가면 한번에 50원씩 받는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을 지나가다 보면 별안간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으니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길 건너편, 큰 도로로 나가는 우측 골목에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모습이 담긴 앨범 자켓을 유리창에 전시해 둔 음악다방이 있었다.

뭐가 그리 어려웠는지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 밖에 서서 VCR로 보여 주는 카라얀 지휘 공연 영상이나 파바로티의 공연 영상을 보곤 했다.

그 골목을 빠져 나와 큰 길을 우측으로 돌아가면 작은 구두방을 지나 지하상가로 가는 길이 있었다.

아주 조그만 지하상가였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에는 풀빵 아주머니가 늘 계셨다.

천 원에 한 삼 십 개 쯤 되지 않았을까?

뜨거운 풀빵을 한 입에 넣으면 입 천장에 쩍쩍 달라붙으며 밀가루 냄새를 품어냈다.

풀빵 아주머니도 잘 계실까?

요 무렵, 비 오는 때라면 더 생각이 많이 난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의 W시, 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아도 자주 못 가는 이유는 가더라도 그분들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지.


중앙시장에서 팔던 김치 만둣국도 생각이 나고 C도로 건넛편 철길 옆에서 만들어 팔던 짜장면 생각도 난다.

연강춘에서 고참 주방장으로 계시다가 그만 두시게 되었다는 주방장 할아버지.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했는지, 어떻게 알고 다들 그리로 찾아왔다.

기억하고 싶은 맛은 잊지 못하는 추억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맛을 찾았다 해도 약간 다르면 어쩐지 서운하다.

그 집을 따라 골목 저 끝으로 걸어가다 보면 들기름으로 구워내는 두부구이집이 있었다.

소금만으로 간을 했던 그 집도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런 집이었다.

어느 한 집, 맛없는 집이라고 할 수 없이 다 특색 있고 맛있었다.


중앙시장에서는 이런 아릿한 추억이 있었는가 하면 남부시장에는 그곳에서 먹어봤던 음식을 직접 만들어 봤던 경험이 있었다.

찹쌀 반죽으로 도너츠를 만드는 아저씨가 남문 곁 골목 옆에서 장사를 하셨다. 며칠 동안이나 그 모습을 관찰했다. 

한참이나 반죽을 하다가 싹싹 밀어내어 길게 뽑아 낸 다음, 손날을 이용해서 툭툭 잘라내었다.

엄지손가락을 네번째 손가락 둘째 마디에 갖다 내었을 때의 크기, 딱 그 정도 크기로 잘려 나갔다.

다시 암반에서 손바닥으로 사사삭 굴리면 동글 동글하게 됐다.

아니지, 그 전에 팥소를 넣은 다음에 굴렸구나.

아무튼 그리 동글하게 만든 생지를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넣으면 조금 이따가 둥실 둥실 떠올랐다.

채를 가지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 예쁜 갈색빛을 띄었다.

잘 익힌 다음, 한번은 설탕이 뿌려진 판에 넣어 굴리고 한번은 맨 판에 굴려둔다.


나는 설탕을 묻히지 않은 게 좋았다.

언젠가의 그 소녀를 만났던 동네에 세 들어 살던 나는 엄니와 주인 아주머니를 방에 모셔 두고 부엌에서 그걸 만든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반죽이 좋았다.

역시.


팥소는 없었기 때문에 설탕만 뿌리기로 하고 동글동글하게 만든 생지를 끓는 기름에 넣었다.

살짝 가라 앉았던 도너츠가 뽀로로 뽀로로 올라 온다.


'햐아~~' 신명이 났다.

튀김채를 가지고 살살 굴렸다.

갈색빛을 띈다.

먹음직스러웠다.

엄니와 아주머니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아냐, 지금은 아니야....'


스스로를 달래며 좀더 예쁜 갈색이 되기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


그때였다.


'펑', '펑' 소리를 내며 반죽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풍선 터지는 소리쯤 되었을까?

펑펑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엄니와 아주머니가 방에서 뛰어 오셨다.

너무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서 튀김채를 낚아 채시더니 서둘러 반죽을 싱크대에 부으셨다.

가스불을 끄고 기름 천지가 된 부엌을 치워내셨다.

누구보다 많이 놀라고 속상한 나를 안아 주시고 그날은 아마 주인 아주머니네서 저녁을 먹었지 싶다.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좋으신 분이셨는데...

고등학생이던 막내아들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고 하니 흐른 세월에 비해 내가 너무 무심했다.

추억 많았던 그곳.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겨둘 뿐이다.

오늘처럼 내 생에 가장 맛있는 라면, 이라는 얘기가 언제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입에서 흐른다면 나는 또 오늘처럼 그때의 기억을 추억해내겠지.

언제일까.

기억의 조각들이 온전히 만들어져서 예쁜 도너츠가, 얼큰한 국밥이 될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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