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쳤나봐

그 남자는 누구?

by 가끔은

새로 나의 방에 입성한 나눔 받은 키보드는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전 사용자가 길들여 놓은 탓인지 글자를 하나하나 타이핑할 때마다 느껴지는 타격감도 좋고, 그 소리마저 경쾌하게 들렸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단축키가 많지가 않고 크기도 작은 편이어서 작은 내 손에 맞춤 설계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뭐 크게 다르지 않은 키보드이지만, 단축키 버튼이 많지 않은 대신 이전에 보지 못한 빈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난 좀 더 자세히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빈 버튼은 아니었고, 뭔가가 새겨져 있던 흔적만 남은, 마치 어릴 적 넘어진 흉터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한 그런 버튼이었다. 손으로 살짝 그 흔적을 느껴보려 두 번째 손가락을 공백 버튼 위에 올려놓았다.


+반짝


본능적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어, 뭐지?’


분명 반짝거렸다. 내가 오늘 먹은 게 별로 없었던 걸까? 빈혈도 아니고, 눈앞에 뭔가 반짝하는 것이 지나간 듯했다. 손에 어떤 감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반짝임이었는데, 다시 한번 손가락을 올려보았다. 그 순간, 내 눈앞에 커다란 무언가가 쭉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난 정신을 잃은 듯하다.


분명히 키보드의 타격감에 감탄하며 자기소개서를 수정하고 있었는데, 잠시 졸았던 걸까, 아니면 여긴 꿈인 걸까, 내가 모르는 어떤 공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이 공간은 친근했고, 눈에 보이는 디테일들은 평소에 내가 눈여겨보던 인테리어의 한 부분을 재현한 것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꿈인가 봐, 낮에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꿈속에서라도 인생의 에피소드를 채우느라고 참 리얼하고 선명하네’


혼자서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나의 웃음소리는 나만 들릴 정도로 작은 숨소리 같았는데, 이 숨소리가 이 공간에서 꽤 크게 느껴졌다.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듯한 이 남성. 설마, 내가 인테리어에 이런 남성상을 심어 놓았던 건가. 평소에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들을 갖춘 모습으로 한 남성이 나의 숨소리에 크게 반응했다. 아니 반응했다기보다 내가 숨을 내뱉자마자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그냥 나타났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전 남자친구의 장점이 부각되고 단점을 보완해 낸 거기에 아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정말 이상적인 모습의 인간이었다.

적당히 힘이 있는 머릿결-이전 남자친구의 머릿결이 생각이 났다. 차르르한 머릿결이 예술인 친구였는데, 그건 머리를 감고 난 후 1시간 동안만 유지되는 머릿결이었다. 이내 힘이 없는 얇은 머리카락의 소유자인 그 친구는 푹 꺼진 머리를 연신 뒤로 넘겨댔고, 금방 떡이져 갈라져 버리는 앞머리카락이 마지막 정을 제대로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굳이 이전 남자친구가 소환될지라도 그 머릿결이 보완된 내 눈앞의 남자는 이목구비 또한 예술이었다. 철저하게 내 기준에서 말이다. 무쌍이지만 속쌍꺼풀이 슬쩍 보이는 동그란 눈,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고, 콧볼도 과하지 않게 적당한 콧날이 인상적이었다. 입술은, 입술은, 말로 해야 하나, 이거 정말 꿈이면, 내 입술에 포개어 보고 싶다..


“미쳤나 봐”


나도 모르게 탄식에 가까운 말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내 눈에 보이던 그 완벽한 인간이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서의 톤에 비해 실제 감정노출 임계치는 낮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감정 진폭을 유발했나요?”

“혹시 제가 이상형으로 보였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분명히 팩트로 나를 때리고 있는 듯한데,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했다.


“여긴 어딘가요?”


엄마처럼 내 속내를 읽는 듯 한 이 남성에게 내 마음을 들키지 않고 싶어서인지 방어기제를 잔뜩 세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런데,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를 보셨어요? 면접관이세요?”


그때였다. 뭔가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붕 뜨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마치 뭐랄까 누군가 네모난 상자에 나를 넣고 흔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어지러운 걸 좋아하지 않아서 놀이기구도 20대 초반 이후로는 타지 않던 내게, 이런 기분은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눈을 꼭 감았지만, 나 꿈속에서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건 처음 알았다. 눈앞에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들이 지나간다. 이런 꿈이면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피곤하다.


“면접관이 편하신 듯하여 장소를 바꿔 보았습니다.”

“네?”


이리저리 굴러가던 상자는 이내 내가 어젯밤 제출하려고 하던 회사의 로고가 잔뜩 나열되어 있는 그 회사의 회의실 정도로 변신을 했다. 정말 변신이었다.

아까 이상형의 그 남성은 검은 수트를 입고 내 앞에 자기소개서를 들고 앉아있었고, 난 팔다리가 떨리는 면접의 상황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 남성이 입은 수트는 한눈에도 기본디자인에도 불구하고 고급옷감을 사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힘이 있는 그 머릿결을 잘 빗어 넘겨 고정한 헤어스타일과 분명 탁자 저 멀리 앉아있는 저 남성의 향수냄새는 시트러스향과 우디향이 적절하게 섞인 나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번 꿈은 내 생각의 흐름대로 바뀌는 이상형의 변신인 건가? 이 정도로 다방면의 남성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상자쯤은 견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아주 멋지게 반영한 이번 꿈은 이런 매력적인 상황에서도 면접이라는 부담감으로 인하여 팔다리가 덜덜 떨리는 신체반응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와,, 오랜만에 가위에 눌리나 봐, 나 아직 취직하면 안 되겠어, 이런 악몽을 꾸다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이력서 내지 말아야겠다’


아직도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얼른 깨야겠다는 생각에 집중을 하고 있던 그때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이력서로는 그 어떤 회사에서도 당신을 채용하지 않을 듯합니다. 정중하게 책임감을 논하는 이 자기소개서는 실패를 회피함으로써 성공 경험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네요.”


본격적으로 나에게 할 말이 많은 듯한 이 남자는 계속해서 내 자기소개서를 분석해 나갔다.


“아 오타도 있어요. 중간중간 오타체크도 하셔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평가가 쏟아지자 갑자기 욱하는 분노조절장애의 자아가 올라왔다. 분명 꿈일 텐데 머뭇거리게 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


‘힘을 내, 평소에 할 수 없던 거라면, 꿈에서라도 해보는 거지,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서 내뿜어 보겠냐, 힘내자.’

“오타는 늘 체크했어요, 이번에는 다만 키보드가 말썽이어서 잘못 저장했었던 것뿐이었어요. 늘 그런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네, 성향을 고려하여 언급했지만, 팩트로 말씀드리자면, 이 자기소개서는 감정 노출 기피에 과장된 서술을 더해 인간관계까지 연결된 회피성향이 다분히 드러납니다.”


‘취소. 아까 입술을 포개어보고 싶다는 내 마음속 자아가 잘못했어. 모양만 포개고 싶으면 뭘 해, 나오는 말은 절대로 내 스타일이 아니야.’


헌데 지금의 이 남자의 분석이 너무 나를 꿰뚫어 보고 있어서 굉장히 기분은 나쁜데, 묘하게 끌리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 나쁜 남자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내가 무의식에서 추구하던 이상형은 이런 사람이었던가!


맞다. 나는 패배자를 인정한다. 절대적으로 내 속에서만 인정한다. 요즘 내가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모두에게 나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난 스스로 패배자로 선언했지만, 누군가에게 패배자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감정노출기피자. 이러한 나의 모습을 최대한 포장하려 들었던 자기소개서의 문장들은 당연히 과장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이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 때문이었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냥 허무한 꿈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마주하는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난 어제 언제부터 누워 자고 있던 거였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키보드.

분명 그 공백의 버튼을 누르고 내 눈 속으로 무언가 빨려 들어왔는데, 그곳은 그냥 그렇게 꿈이었던 것인가? 부랴부랴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보았다. 혹시나 또 그 눈앞에 무언가 빨려 들어오는 것들이 생길까 봐 실눈을 뜨고 손은 키보드 근처에 대지도 않고 얼굴을 들이댔다.

이전 키보드와 비교해 보려고 팔을 뻗었으나, 저 구석에 발로 꾹꾹 밀어놓은 이전 고장 난 키보드는 나오고 싶어 하지 않은 모양새다.

어라, 손에 닿으면 또 반짝 빛이 날 것 같은 그 버튼, 어제 분명 내가 보았던 그 공백의 버튼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떤 흔적이 지워진 채로 보이는 그 버튼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아니면 내가 그냥 NumLk키를 눌렀던 것일까? 정말? 정말 그 지워진 버튼이 없다고? 어제 그 짧은 순간 지나간 반짝임, 정말 빈혈이라도 있던 거라고? 어제의 그 손끝의 느낌을 더듬어 기억하며 두 번째 손가락을 어제의 그 위치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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