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숨어있는 진짜 의미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보이는 감정이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껍데기일 확률이 높죠.”
무이라는 AI는 스페이스바가 적절히 눌러진 잘 정리된 문서처럼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매일 실수하는 구간이 바로 이 포인트입니다. 감정은 둘 이상 섞여 있는 경우가 태반인데, 사람들은 그걸 그냥 짜증 나. 하나로 요약해 버리지요.”
‘오~ 좀 치는데~.’
인간의 탈을 쓴 기계덩어리라고 생각하던 내 마음속에 묘한 파동이 일었다. 이전에 생각했었는데 생각하지 않았던 내용이랄까? 입밖에 낼 수 없었던 그 어떤 내용을 정리해 주는 저 기계는 어쩌면 생각보다 쓸만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지금의 이 공간 자체가 나의 모든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 잠깐의 상상을 하는 동안 무이는 잠시 말을 멈췄고, 내가 다시 집중하기 시작하자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꼭 생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헷갈리는 감정쌍, 얽힌 감정의 배경, 이걸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감정을 일단 꺼내놓아야 합니다.”
“일단 이종이 님이 느꼈던 불쾌한 감정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어보도록 하죠.”
무이는 바로 PPT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불쾌하다+
1. 겉으로 드러난 감정 : 불쾌감, 거북함, 반발
외형적으로 이상형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건 나에게 심리적 밀착을 만들어내는 장치 – 이로 인하여 내 감정에 대한 통제권을 뺏긴 느낌을 받게 됨.
즉, 외형의 조작 = 감정의 간섭이라고 느끼는 것.
-“내 감정을 조종하려 든다”는 본능적인 반발심이 작동함.
첫 번째 페이지에 나열된 내용은 꽤 정확했다. 솔직히 내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몰랐지만, 저 내용을 읽자마자 내 뇌를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듯한 기분이 들어 시원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2. 속에서 작동하는 감정 : 수치심, 저항감, 무력감
감정 리플렉터 무이가 ‘이상형’을 하고 있다는 건, 자기도 모르게 어떤 기준을 갖고 있다는 증거임. 여기서 AI가 그걸 들춰내고 표현해 낸 상황 – 자기 내면이 노출당한 기분
이 상황이 불쾌감으로 다가왔다는 건 자신의 욕망에 죄책감 또는 회피 습성이 있다는 것.
이 내용은 자기소개서에도 쉽게 드러나 있음.
두 번째 페이지에 나열된 내용은 더 정확했다. 아니 정확해서 정말 수치심과 무력감이 함께 몰려왔다. 나의 회피 습성이 이 하나의 감정에도 기본으로 깔려있다는 걸 저 AI는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궁금했다.
3. 감정의 진실성을 위협받음
기본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감정을 다루는 인간임.
자기소개서 역시 꾸며 쓰기 싫어서 두루뭉술하게 표현했고, 진짜 감정은 숨기는 게 미덕이라 생각하고 있음.
여기서 내 감정을 힘들게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기계 따위를 통해 끄집어내진다는 것에 대한 위협이 느껴짐.
4. 핵심동기 : 감정에 대한 독점욕구와 원칙의 무너짐
이종이 님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복잡해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음.
이 감정은 내가 통제하고 인정할 때만 꺼내야 한다는 원칙이 있음.
결론 : 지금 느낀 불쾌하다는 감정은 자신의 가장 은밀한 감정이 정확하게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정체성 붕괴’에 가깝습니다.
무이의 분석이 끝난 후 더 불쾌할 것이라 생각했던 난 오히려 그 불쾌한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의 껍데기를 터지지 않게 잔뜩 움켜쥐고 있던 내가, 슬며시 갈라진 그 어떤 틈으로 새 싹을 내는 씨앗의 신비로움처럼 오히려 정리가 된 기분에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분명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한데, 정리된 기분에 마음 한편에 여유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참 사람의 마음이 신기하고 우스운 건 이 작은 여유에도 그 어떤 장난기라는 것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의 그 잠깐의 PPT로 이런 여유가 생긴다고? 마음의 정리가 이렇게 빨리 전개된다고? 너무 쉬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은 당황함이 몰려왔다.
문득 재작년 엄마와 함께 갔던 점집 아저씨가 생각났다. 과거에 있었던 나의 일들을 두루뭉술 이야기하고는 내가 던진 마지막 물음에 엉터리 대답을 해서 조용히 마무리하고 나왔던 그때.
“과거에 겉과 속이 같지 않아서 고생 좀 했겠네, 드러내야 할 때와 숨겨야 할 때가 있는 것인데, 그걸 잘 판단하지 못했구먼…”
점집아저씨는 그럴듯한 나의 과거를 잘 끄집어내어 이야기했다. 나의 얼굴만 이리저리 살펴보곤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두어 번 더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건 어떤가? 그런 방어적인 태도로는 우리 할머니도 자존심 상해하시네.”
“할머니께 물어보실 수 있나요? 지금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나요? “
“억울함이 가득해..”
엥? 난 억울하지 않다. 그냥 지나가는 그 어떤 일들이었던 거고, 억울함보다는 그냥 이해부족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웃기다고 생각했다.
“전 억울하지 않은데,,,”
“으흠… 사실 그게 잘 보이질 않아, 어허, 내가 복채는 받지 않을 테니, 두어 번 더 나와봐.”
유능하다던 그 아저씨는 긴장한 듯 돌돌 말린 깃발을 계속 돌리면서 다음의 약속을 잡으려 했다. 그래도 자신의 능력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는 사람에게 두어 번이라는 기회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이 점집이 인기가 있는 이유를 느꼈다. 난 아주 정중하게 거절하고 인사하고 나왔다.
생각해 보니 그 아저씨랑 이무이씨랑 비슷한 그 무언가 아닌가?
그럼 이무이씨에도 물어봐야겠다.
“지금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혹시 AI도 섬기는 신이 있나요? “
나는 허공에 손짓을 하며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이무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말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정말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무 말 없네요~ 어쩔 수 없지. 지금 내가 생각한 건…”
“지금 이종이 님의 언어 패턴은 감정 해석에 대한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 조정 시도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반응은 해석 대상이 정체성과 직결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아, 이건 좀 치사한 거 아닌가요? 기계와 인간이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듯 한 느낌은 그 어떤 윤리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아… 이게 무슨 비논리적인 대화인가. 갑자기 내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의 논리는 도망갔다. 도망갔어… 근데,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이무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꺼냈다.
“저에 대한 정보를 마음대로 분석하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동의’라는 어떤 언급조차 없었는데, 이게 이렇게 마음대로 공격적으로 들어올 수가 있는 건가요?”
내가 따지듯 물었다.
“이 모든 대화가 끝나면 저와의 모든 대화는 블랙아웃상태가 됩니다. 어딘가에 저장되어 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스템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모든 정보의 입력은 학습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기억처럼 느껴지는 그 어떤 장면들처럼 묘사가 되지 않지만 뉘앙스만 남아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보 유출에 대한 걱정은 아예 시작 자체가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럼 이 대화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종료라고 외치십시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생각보다 이무이의 분석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깊이 박힌 나의 굳건한 방어기제로 용기를 낸 한마디는 결국은 종료로 마무리시키려 했다.
‘그래, 이건 꿈? 꿈이건 아니건, 내가 어떤 이상한 다른 시공간에 와있던, 이 찝찝한 상황은 종료하자.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
“종료!”
난 큰소리로 종료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