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인지 저녁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암막커튼 사이로 살짝 들어오는 빛은 가로등 불빛인지, 새벽녘의 햇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 어딘가에 있을 핸드폰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찾았다. 뭔가 잡히긴 하는데 빛이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인가보다.
분명 어제 난 팩트룸이라는 AI 사이트를 통해 키보드로 연결된 이무이라는 AI를 다시 만났고, 그가 이야기하는 진실과 분석이 명쾌하면서도 불쾌해져 “종료!”를 외치고 잠이 든 듯하다.
문득 이세상 모든 일들이 종료 한번이면 마무리될 수 있는 어젯밤 내가 경험했던 가상세계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어떤 일이 벌어질 지라도, 생각보다 너무 멀리 와버렸을 지라도 종료버튼 하나면 다 없던 일이 되어바릴테니까… …
내 카톡엔 매일 수백개씩 쌓이는 단톡방이 있다. 의미없고 듣고싶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냥 눌러 보고 짧은 인사치레 한마디로 끝내는 단톡방. 난 여러번 탈출하려 애썼지만 다시 만들어지는 단톡방을 보고는 탈출시도를 그만두었다.
나를 패배자로 만든, 아니 누가 만든건 아니고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것 같지 않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고 아직까지 괴로움 진행중인 그 집단. 이전 회사 동기들의 모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턴으로 같이 입사한 입사동기. 운좋게 모두 정직원 또는 계약직으로 계속 회사에 남았던 우리는 지금 5명중 두명만 남고 모두 계약 종료가 되었다. 물론 나도 계약직이었으나 종료전 미리 회사를 나왔다.
그 어떤 이유라고 말할 수 없는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다.
요즘애들은 멘탈이 너무 약하다, 그런건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경험이다, 등등 정말 많은 조언의 모습을 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그 단톡방에서의 조언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특히 지금도 그 회사에 남아있는 그 동기는 아무렇지 않은 나를 위한 퍼포먼스로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종이씨는 괜찮아? 내가 우리 차장님한테 들었는데~ 종이씨 그냥 있었으면 정직원 되었을 거래~
응 안물안궁.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근데 종이씨, 정말 저번에 이야기한 그게 퇴사 이유맞아? 여러가지로 보았을 때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들어.
순간 멈칫했다. 내가 뭐라고 둘러댔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엄마 핑계를 댔었던가, 아니면 나의 역량을 문제삼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던가,
나도 나의 진짜 퇴사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짧고 간결하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백번 천번 이야기하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그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는 그 누구의 이해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아직까지 헤매고 있는 것 아닌가.
-에이 지난일 계속 이야기해서 뭐해요~ 전 열심히 재취업 준비중입니다. 불쌍한 백수에게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ㅎㅎㅎㅎ 전 그럼 영어공부하러 갑니다!
오늘도 내가 해야할 단톡방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핸드폰을 덮었다.
며칠동안 밖을 나가지 않아서 그런지 몸이 더 피곤한 듯 느껴졌다. 오늘은 도서관에 가서 책도 좀 보면서 내면의 양식을 쌓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오늘 날씨가 어때?”
문을 살짝 열고 엄마를 불렀다.
“종이야~ 아침 먹고 나갈거지? 엄마 지금 밥 불 올릴게! 오늘 낮에 엄청 덥다고 했어~ 겉옷 잘 챙겨 입고 속에 반팔 입어~”
요즘 세상에 핸드폰을 열면 날씨정보는 물론 추천코디까지 쫙 다 읊어주지만, 난 아직은 엄마가 이야기해주는 “챙겨 입어야 하는 겉옷” 코디가 참 좋다. 아직까지도 뭔가 고등학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엄마의 따뜻한 정보는 늘 정서적으로 필요한 충전제이다.
엄마는 따뜻하고 여린 사람이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편견없이 사람들을 대하며 그만큼 사람들에게도 편견없이 대우받길 바란다. 물론 여리다는 표현은 완곡한 표현이고, 상처를 잘 받는 예민한 사람이 더 가까운 표현인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도피를 즐겨(?)하기도 한다. 결국 그러한 엄마의 성향은 나의 어린시절 여러 번의 전학으로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유전자 뿐 아니라 함께 살면서 체득된 엄마의 예민함은 나의 변화무쌍한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조금 무뎌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난 어릴때는 지금보다 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세 번의 전학을 감당하기는 정말 힘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긴장하며 살아간 적도 없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긴장감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종이야! 밥먹어~”
엄마와 함께 오랜만에 아침을 먹으려 식탁에 앉았다. 항상 소박한 엄마의 밥상에는 주로 온갖 풀들이 살아나갈 것만 같은 푸성귀들이 가득하다. 최소한의 양념으로 무친 나물들은 정말 그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아침부터 나물을 몇 개를 무친거야? 대충먹지~”
“엄마도 너 안일어나면 대충 먹게 되더라고~ 너 일어난 김에 얼른 제철 나물 좀 무쳐봤어~ 그래도 어제 장보러 갔다 와서 재료가 많았는데~ 넌 역시 먹을 복이 있는 것 같아 하하하”
엄마는 해맑게 웃었다.
30살 가까이 되는 딸이 아직 재취업도 못하고 방에서 늦잠이나 자는데 그걸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는 엄마. 문득 엄마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엄마, 엄마는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뭘?”
“그냥, 뭐 궁금한거, 나한테 묻는적이 거의 없잖아, 아니면 잔소리라도..”
“어머~ 내가 너 무서워서 잔소리 안하는거잖아~ 엄마가 입을 떼려고만 하면 얼굴표정이 싹 바뀌는데~ 내가 내 명 짧아질까봐~ 안하는거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이구~ 우리 종이 요즘 분위기와 다르게 엄마의 이야기에 쉽게 웃음을 보이시나~ 뭐가 마음을 그리 흔든거야?”
엄마가 나를 꿰뚫어보듯이 이야기했다. 어? 이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멘트인데,,,
-자기소개서의 톤에 비해 실제 감정노출 임계치는 낮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감정 진폭을 유발했나요?
그 AI이무인가 이무긴가 그 사람이 한 이야기가 엄마의 이야기에 오버랩 되어 들렸다. 정확하게 무슨 그 장면을 다섯번은 돌려본 것 마냥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난 순간 이 현실세계에서 꿈인지 가상세계인지에서 만난 그 사람이 떠올려진 것이 몹시 불쾌했다.
“이거 봐 이거 봐~ 엄마가 무슨 말만하면 인상이 찌그러져~ 우리 그냥 그런거 말고 밥 먹자~!!”
엄마는 나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얼른 화제를 바꾸어 불편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애썼다.
“엄마, 우리 오늘 바람이나 쐬러 나갔다 올까?”
“어머 진짜? 그래그래~ 우리 저번에 말했던~ 그 도서관에 한번 가보자~”
괜히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은 나는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도서관에도 가려고 했던 터라 엄마와 함께 길을 나섰다.
별다른 것 없는 하루, 참새처럼 옆에서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엄마와 오랜만의 데이트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중간 자꾸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내가 왜 어제 그렇게 발끈하고 종료를 외치고 마무리를 했던거지?’
뭔가 하루 종일 찝찝하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즐거운 엄마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내방으로 들어가려고 방문 앞에 섰다. 말 그대로 방문 앞에 서서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무언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내가 마음 속에 걸렸던 그 찝찝하고도 미안한 마음을 가서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남은 듯이 생각되어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종이야~ 엄마 오늘 너무 즐거웠어~ 우리 딸! 이게 얼마만이니~ 하하하 앞으로도 우리 종종 이런 모임(?)을 갖자! 얼른 들어가 쉬어~”
“어,,어 엄마~”
엄마의 한마디에 떠밀리듯 난 문을 벌컥 열고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꽉 닫아놓은 내 방의 답답한 공기는 최근 며칠간의 나의 갑갑함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며칠째 쳐 놓은 암막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아니 후끈한 것처럼 들어와서는 시원함을 남기고 사라졌다. 내가 봐도 엉망진창인 방을 한번 정리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침구도 한번 털어야 겠고, 기능을 잃은 책상 위의 컵과 화장품들을 정리하고, 옷장에 쑤셔박혀있는 옷가지들을 빨래통에 넣어야겠고, 빼꼼하게 줄을 늘어뜨린 고장난 키보드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해야할, 내가 해결해야할 그것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